<신문기자> 리뷰
1. 토우토 신문 사회부 기자 '요시오카 에리카(심은경)'는 어느 날 익명의 제보를 받고 취재를 시작한다. 아베 총리실에서 편법적으로 국가전력특구 안에 사립대학 수의학부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는 것. 한편 내각정보조사실에서 근무하는 '스기하라 타쿠미(마츠자카 토리)'는 가짜 뉴스 유포와 댓글 조작을 통해 정권의 불리한 정보를 차단하려는 상부의 지시에 의문을 품는다. 그러던 와중 스기하라가 존경하는 선배 '칸자키(타카하시 카츠야)'가 자살한다. 그의 죽음에 숨겨진 이유가 있음을 눈치챈 스기하라는 장례식에서 요시오카를 만난 후 진실을 밝히는 일이 자신의 손에 달렸음을 깨닫는다.
많은 영화들은 작중 문제 혹은 의문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말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닫힌 결말로 끝난다. 반면에 <터미네이터 2>, <베이비 드라이버>와 같은 영화들은 작중 문제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끝나기도 한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관객들이 직접 답을 찾을 기회를 주기 때문에 작품의 메시지를 더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베 총리의 사학 스캔들을 폭로하는 <신문기자>도 마찬가지다.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이 영화는 언론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가 무시되는 일본 사회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2. 사실 <신문기자>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이 작품은 서로 다른 두 장르를 세련된 방식으로 연결하는데 실패한다. 작중 내각정보조사실에서 일하는 스기하라는 사회고발 영화의 서사를, 기자인 요시오카는 저널리즘 영화의 서사를 담당한다. 그들은 각각 주변의 만류를 뚫거나 조직을 거스르면서 총리실의 부정을 폭로하는데, 영화는 그 동기를 가족애로 설명한다. 요시오카는 아버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고 싶어 하며, 스기하라는 막 태어난 딸에게 당당해지고 그녀가 살아갈 세상을 더 옳게 만드려고 한다. 이러한 전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만, 동시에 진부하고 안이한 방식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신문기자>는 각 장르의 법칙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곧장 따라간다. 사회고발 영화는 주인공이 조직적인 강압에 의한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이 주를 이루며, 주인공은 보통 직업윤리와 신념에 기초해 외압에 저항한다. 작중 스기하라와 칸자키 역시 국가 공무원으로서 국가, 국민, 그리고 정권의 관계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옳은 길을 선택한다. 저널리즘 영화의 경우 발언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에 맞서 개개인의 기자가 진실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전개가 대부분인데, 요시오카와 주변 인물들의 드라마 역시 전형적인 흐름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무난한 영화의 완성도, 전개, 매력이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 큰 단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롭다. 실제로 다소 무색무취한 듯 보이는 스토리텔링은 역으로 영화의 열린 결말을 충격적으로 만들어주고, 이러한 엔딩은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힘을 실어준다.
3. 결말에서 영화는 요시오카와 스기하라 사이의 마지막 대화 내용을 들려주지 않는다. 단지 충격받은 듯한 스기하라의 표정과 요시오카의 역동적인 표정을 대조시킬 뿐이다. 이러한 결말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많은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다만 두 인물이 영화 안에서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 삽입된 곡의 가사 속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스기하라는 마지막 순간 권력에 맞서 싸우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작중 스기하라는 일본 시민사회의 양심이나 다름없다. 그는 언론이 말하고, 정부가 발표하는 내용을 믿고 열심히 살아왔던 소시민이다. 그런 그가 실명을 공개하면서까지 총리실의 부정을 고발하자 마침내 주류 언론들이 사건에 주목하고, 총리실의 부정도 세상에 알려진다. 반면에 요시오카는 스기하라가 문제를 깨닫고 그녀를 찾을 때까지 총리실에서 추진하는 대학 사업에 대해 기사를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스기하라의 목소리를 전할 수는 있어도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중 요시오카는 한국인 어머니를 뒀으며, 미국에서 성장한, 일본 사회의 순종적인 언론들과 공동체 문화가 빚어내는 폐해를 이미 알고 있는 외부자일 뿐이다. 따라서 <신문기자>는 스기하라처럼 자각하는 시민들만이 일본 사회의 문제룰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영화의 결말은 현재 일본 사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일본은 아베 정권이 우경화되면서 언론의 자유가 탄압받고,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시민들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험이 없는 일본 시민들은 양처럼 순응할 뿐 주권자로서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스기하라의 좌절과 포기는 일본 시민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은 엔딩 크레디트 곡인 "where have you gone"을 통해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어둠에도 빛이 비친다(Into the darkness goes the light)"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는 "좌절하더라도 눈을 크게 뜨고 어둠을 들여다보며 빛을 찾아야 한다(Take all my despair, Eyes wide falling, Till I find you)"는 가사로 끝나면서 관객들을 격려하고 힘을 불어넣는다.
4. 한편 <신문기자>는 살아있는 권력에 저널리즘 영화다운 객관적인 시선으로 맞서는 독특한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더 포스트>, <스포트라이트> 같은 저널리즘 영화들도 부패한 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이 작품들은 수십 년 전의 사건을 다룰 뿐이다. 반면에 <신문기자>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여러 사건들을 다루며 아베 정권에 맞서면서 차별화되는, 그리고 진정성이 느껴지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메시지가 부족한 완성도마저 잊게 만들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다.
또한 <신문기자>는 댓글 조작, 가짜 뉴스 등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현 정권을 향해 단순한 분노를 터뜨리지 않는다. 대신 저널리즘 영화답게 분노를 눌러 담는다. 영화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진실을 알려주어서 고맙다며 냉정함을 유지하려는 요시오카처럼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정권의 치부와 일본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2019년 기준 일본의 언론자유지수가 67위(한국 41)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영화의 태도는 더욱 인상적이다.
5. 지난 6일 <신문기자>는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석권했고, 국내에서도 심은경 배우의 수상 소식에 큰 화제가 됐다. 그 덕분에 <신문기자>는 최근 신작이 많지 않은 관계로 11일에 재개봉한 상태다.
사실 심은경 배우가 나온다는 점을 제외하면 <신문기자>는 일본 정치와 사회를 다루는 낯설고 어려운 영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의 권리는 가볍게 무시하는 정부, "민주주의는 형태만 있으면 돼"라고 말하는 권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신문기자>는 깊은 여운과 전율을 선사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