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1년이 찾아오기 직전, <런 온>을 처음 접한 순간을 기억한다. 출연하는 배우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연히 넷플릭스로 접하게 된 드라마. 그래서일까. 기대나 관심은 크지 않았다. 어떤 직업군이 나와도 비슷비슷한 로맨스를 보여주는 그런 작품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대표 육상선수와 영화 번역가가 만나 대화를 시작하고 서로를 알아가는 순간, 이들의 로맨스는 예상과 편견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이 의외의, 그러나 기분 좋은 배신은 '선겸(임시완)'이 '미주(신세경)'에게 건넨 한 대사에서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그게 결승선이었는데 오늘은 사람이었네요. 나 오늘 기록 쟀으면 9초대였을지도 몰라요."
2. 그러자 미주는 이렇게 묻는다. "9초 대면 어떤 건데요? 좋은 거에요?" 웃으며 답하는선겸. "완전 좋은 거죠."이 짧은 문답은 그 자체로도 운명적인 사랑, 첫눈에 반한 사랑, 본인들은 몰라도 이미 사랑에 빠진 이들의 마음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육상에 대해서 조금만 알고 있다면, 세계 기록이 9초 중반으로 향하는 현재도 10초대가 한국 신기록인 상황을 알고 있다면 그 설렘, 흥분, 떨림, 긴장은 더욱 배가된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이 장면을 계속해서 곱씹어 보게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선겸이 미주를 보고 달리는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절실한 그의 역주는 한 사람뿐만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겸은 재벌 후계자가 운영하는 에이전시의 관리를 받고, 유명 스포츠 브랜드 광고에 출연하는 스타다. 재벌 할아버지, 유력 대선 후보 아버지, 국민 배우 어머니와 골프 황제 누나를 둔, 남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누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그의 삶은 공허하다. 그가 꿈꾸던 인생이 아니었으니까. 창 던지기 선수였던 그는 부상을 당한 후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달리기를 종목을 바꿨고, 그의 인생은 100m 달리기의 기록처럼 숫자로 가득했다. 그의 꿈은 아버지의 지지율을 위해 희생당했고, 그의 기록과 성공은 아버지의 득표율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의 사랑과 미래는 아버지의 정치 자금을 위한 거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보다는 억누르며 아버지가 원하는결과를 위해 살아야 했다. 미주를 만나기 전까지.
3. 그런 그의 눈에 미주가 들어온다.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 인생에 무심코 한 걸음 들어선다. 첫 순간부터 강한 호감을 느끼지만,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영화를 보고 울고 웃는 그녀를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성장 환경과 배경이 전혀 다르니 당연한 일이다. 미주는 가족이 아닌 보육원의 손길 아래서 자랐고, 돈이 없어서 교수에게 굽실거리고 '용돈'이라는 미명 아래 부당하고 굴욕적인 심부름값을 받기도 한다. 대로변에 얼굴과 이름을 내세운 광고가 걸리는 선겸과 달리 영화 번역가인 그녀의 이름은 영화의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야만 간신히 보이는, 대부분의 관객은 무시하고 나가는 자리에 걸려 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선겸이 가지지 못한 당당함이 있다. 거의 항상 돈에 쪼들리고 굴욕적인 처우를 받을지언정 결코 비굴하지 않은 그녀는 피고용인이라는 약자의 위치에서도 영화감독, 제작자, 심지어 재벌이나 정치인에게도 해야 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비록 자신의 이름과 공로를 알아주는 이가 거의 없을지라도 그녀는 자신의 작업, 역할,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 결과에서 의미를 찾는 육상 선수와 번역가는 다르기 때문이다. 미주는 영화와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통해 자신이 있는 없는 듯, 튀지도 않고 평범하지도 않게 관객에게 전달하는 게 본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비록 자신의 공헌이 결과로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에서 스스로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것이다.
4. 그래서일까? 그녀는 옆에 있는 누군가의 말, 심정, 사연, 인생을 들여다 보고, 공감하고 이해하며, 단순히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가장 정확한 표현으로 재해석할 줄 안다. 때로는 사람들이 어떻게 표현할 줄 모르는 내용도 정리하고 이해시켜준다. 그녀 앞에서는 미대생도, 재벌 2세도, 재벌 2세의 비서도, 세계 최고의 골퍼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스스로의 모습을 찾는다. 또한 미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할 때도 가장 정확하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정확히 집어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한다. 이는 <달콤한 인생>, <카사블랑코>, <내 머릿속의 지우개> 등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은 오마주가 드라마 가득 차 있는 이유다.
선겸에게도 마찬가지다. 미주는 그를 자신의 공간인 집과 영화 촬영장으로 불러 자신의 세계를 이해시킨다. 함께 달리자는 선겸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어코 마라톤을 완주하며 그의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렇게 전혀 다른 그의 언어와 자신의 언어 사이의 간극을 없애지는 못해도 가능한 한 좁히고, 그도 모르던 그의 마음을 끄집어내며 이전과는 다른 삶의 시작을 돕는다. 결과만이 가득했던 그의 삶에 목표를 이루는 과정도 무언가 의미가 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렇기에 미주를 만난 후로, 미주를 향해 달렸던 후로 그는 변한다. 미주가 보는 가운데 그는 출발선에서 스타트를 포기한다. 순위와 기록, 메달 만을 바라보며 선수들의 가혹행위를 협회에 문제를 제기한다. 피해자이자 내부고발자로 낙인찍힌 김우식 선수의 재활을 돕고, 앞만 보고 달리는 선수가 아니라 달리는 이들을 돕는 에이전트로서 새로 출발한다.
5. <런 온>은 이러한 선겸과 미주의 관계성을 변형, 반복하며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특히 서브 커플인 '서단아(최수영)'와 '이영화(강태오)'의 로맨스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과 과정을 느끼기 위해 사는 사람의 만남이라는 구도를 더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재벌이자 그림을 사는 사람인 단아는 선겸과 다르지 않다. 기업의 이익이라는 아버지의 목적에 맞춰 생일마저 잃었던 그녀는 영화에게 단지 그림이라는 결과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대학생이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영화는 단아가 잊고 있던 과정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그는 단아가 요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그녀와 만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결과, 단아는 선겸이 그러했듯이 변한다. 선겸이 미주를 보고 그러했듯이 단아는 영화를 보고 배운다. 영화가 그린 그림 그 자체보다, 그 그림을 그리는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녀는 가짜 생일 대신 영화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새로운 생일을 챙기고, 이를 기념해 영화가 생일 선물로 건넨 운동화를 신는다.
흥미로운 것은 두 커플이 맞이한 결과는 정반대라는 점이다. 각자의 일에 충실하되, 서로를 존중하는 커플로 남은 선겸과 미주와 달리 단아와 영화는 가슴 시린 이별을 선택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한 4명의 주인공이 한 데 모여 담담히 웃으며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들의 동행과 이별은 결국 같은 것을 추구한 선택임을 알려준다. 결과와 과정을 모두 얻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삶을 단계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공간인 트랙에서 시작해 환상의 공간인 영화관에서 드라마는 끝이 나지만, 그 끝에서도 계속해서 뛰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런 온(Run On)>은 현실적이지만 염세적이지 않고, 이상적이지만 환상적이지는 않은 이야기로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