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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Feb 18. 2019

1987

악을 뿌리 뽑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이유

1.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예술을 구성하는 두 축인 창조자와 수용자 모두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창조자와 수용자는 제각기 다른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작품의 창작과 해석과정에 개입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창조자와 수용자 간에 공통된 경험이 있다면, 이 경험은 특정한 예술 작품과 만나 독특하게 공명하기도 한다. 영화 역시 예술이기에 이러한 경향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이는 <1987>이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단지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제작자들과 다수의 관객들이 공유하는 6월 민주화 항쟁과 촛불 혁명이라는 공동체 차원의 경험이 본 영화와 강력하게 조응하기 때문이다.  



2. <1987>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이 작품의 주제다. 이 영화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각자의 위치에서, 함께 싸워야 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사시 이 문장은 영화의 주제이기에 앞서 영화의 메시지이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추구한 핵심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는 역사 속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민주화 항쟁에 사이에는 어느 한 도시에서만 발생했는지 혹은 여러 도시가 연계하여 운동을 펼쳤는지에 따른 결정적 차이만이 존재하며, 이 하나의 차이점이 비극과 희극을 결정지었을 뿐이다. 이러한 주제는 영화가 개봉한 2017을 사는 관객들에게는 그들이 최근에 경험한 촛불 혁명과 오버랩되면서 세대별로는 상이한 감상이 가능하다. 뜨거운 벅차오름과 전율 속에서 40-50대는 아련함을, 20-30대는 시간을 뛰어넘는 연대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이러한 단순한, 그러나 역사적 진실이기도 한 주제를 강조하는 것은 이 영화가 지닌 형식적 특징이다. <1987>은 유사 유니버스 형식 영화로 그 방식만을 '참조'한 영화다. 실제로 <1987>은 서로 다른 주인공들이 동일한 주제 하에 상이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진행되는데, 이는 유니버스 영화가 갖는 특징이다. 6월 민주화 항쟁이 수많은 사건들이 상호 영향을 주면서 진행되었고, 한 명의 특출 난 인물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리즈 영화 외에 6월 민주화 항쟁을 영화화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에피소드 간의 연관성이 크고, 주인공들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완전한 유니버스 영화는 아니다.  



3. <1987>은 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김윤석이 맡은 '박처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과 겹쳐지는 씬의 경우 단 한마디의 대사 없이도 영상만으로 작중(실제로도) 만악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각인시키는 강렬하고도 효과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으로, 이 작품의 완성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에프소드의 변화와 발맞추는 장르의 변화도 인상적이다. <1987>은 시간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이에 맞춰 법정 드라마, 저널리즘 드라마, 청춘 드라마, 사화 고발 영화 및 역사 영화로 수많은 장르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렇게 이어지는 장르의 흐름은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김윤석, 하정우, 이희준, 박희순, 김태리, 강동원, 유해진 등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인위적인 느낌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배우들 모두 빼어난 연기를 보여주지만, 특히나 극악하면서도 내면적으로 최소한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박처장'을 연기한 김윤석과 시대와 내적 혼란 속에서 성장하는 시대의 청춘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든 김태리의 연기가 특히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1987>이라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시나리오다. <1987>은 자칫하면 역사를 따라가기 급급해 주요 사건들만 피상적으로 재현할 뿐 사건들 안에 존재했던 사람은 묻혀버리는 영화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87>의 시나리오는 왜 누군가는 그토록 독재정권을 위해 일하고 왜 누군가는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지, 그 상반되는 신념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면서 영화의 대립각을 더 강화시키면서 관객들의 영화의 서스펜스를 강화한다. 또 일반 사람들이 격렬한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두려워하며 사회적 사건에 관심을 주지 않고 생업에 집중하려는 모습, 오히려 그 생업에 집중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민주화의 물꼬를 트는 모습을 대비시키며 소시민적 태도와 소시민적 태도라는 알을 깨고 나오는 감정적 쾌감도 놓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이러한 감정적 변화를 기반으로 역사를 모르더라도 영화를 보는데 문제가 없게 만들었으니, 정말 놀라운 각본이다(물론 각본을 멋지게 영상으로 만들어낸 연출자, 편집자, 카메라, 배우 등도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4. <1987>은 개봉 시기도 주목할 만하다. <1987>이 개봉한 2017년은 전국이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 혁명이 일단락된 시기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발 벗고 광장으로 뛰쳐나왔던 촛불 혁명은 30년 전에 이루어진 6월 민주화 항쟁의 결과물인 '1987년 체제'가 유효하다는 것을, 그리고 여전히 미완이지만 한 단계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우리가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 실제로 언론은 이념의 대립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부패한 권력을 고발했고, 시위대는 일체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며, 경찰은 이러한 시민들의 자유권을 보장했다. 국회는 (전적으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지라도) 헌법에 적힌 절차대로 탄핵을 진행했고, 헌법재판소는 그 절차에 맞춰서 탄핵 여부를 결정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타이밍에 만들어진 <1987>은 피 흘리며 민주주의를 쟁취해 낸 전 세대들의 노력에 대한 헌사이자,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민 개개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민주주의가 유린될 수 있다는 경고를 날리는 영화이다. 즉 <1987>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의의만으로도 바람직한 영화다. 



E (Exceeds Expectations 기대이상)

1987년과 2017년, 30년의 시간이 주는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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