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히어로 영화의 끝은 좋은 경우가 별로 없다. 무리한 속편 제작으로 시리즈가 망하거나(슈퍼맨 등), 제작진과 배급사의 의견 차이 혹은 배급사의 사정으로 인해 시리즈가 취소되거나(스파이더맨 트릴로지 등), 그냥 그 영화가 흥행이 잘 안돼서 시리즈가 끝나기도 한다(판타스틱 4 등). 근래에는 유니버스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시리즈가 완결되더라도 다른 영화에 계속 등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등).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정도가 예외랄까. 하지만 이제 <로건>도 시리즈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은 영화의 목록에 더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뮤턴트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노쇠한 '로건'은 리무진 운전기사 일로 연명하고 친구인 '설리반'과 함께 본인의 정신적 멘토인 '찰스'를 돌본다. 그런 그의 앞에 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새로운 뮤턴트 '로라'가 나타나고, 로건은 찰스와 로라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여정을 시작한다."
2. 위는 <로건>의 줄거리다. 이러한 줄거리는 사실 엑스맨 유니버스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데드풀 2> 덕분에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당시에는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통해 엉켜버린 시간대 등 설정 구멍을 가까스로 메우자마자 <로건>이 재를 뿌리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체 유니버스의 설정을 다시 엉망으로 만들면서까지 휴 잭맨과 제임스 맨골드 감독이 <로건>을 제작한 것은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이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고 <로건>은 실제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3. <로건>은 울버린 3부작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최근에 거의 사멸되고 있던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선택했고, 이는 신의 한 수였다. 도상적으로는 그간 엑스맨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히어로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사막과 황야, 협곡, 미국의 국경지대를 배경으로 하는 신선하고 새로운 영상을 선보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스토리적인 측면에서도 로건을 웨스턴 장르의 주인공에 대입하며 긴장감, 비장함, 애절함 등 영화와 인물의 감정선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히어로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던 히스패닉, 흑인 빈민들을 등장시키 수 있었다. 또한 전성기가 지나고 쇠퇴해가는 서부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한때는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 '울버린'이었지만 지금은 노쇠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럼에도 임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로건'이라는 인간에 겹쳐지는 상황이 독특한 애처로움마저 자아낸다.
4. 엑스맨 시리즈의 주된 스토리 라인은 찰스와 에릭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테마는 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퍼스트 클래스>부터 과거를 배경으로 한 프리퀄 시리즈가 시작되어 이러한 느낌이 더욱 강조되었다. 또 '뮤턴트'라는 존재는 현실 속 여러 사회적 약자 계층을 대변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로건>은 이러한 거시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가족'과 '희생'이라는 테마를 선택했다. 실제로 작중 로건, 찰스, 로라의 관계는 아버지, 할아버지, 딸로 이루어진 가족을 연상시킨다. 울버린의 팬이라면 이처럼 로건이 가족과 함께 하는 모습에 기쁘면서도 눈시울이 절로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로건이 겪은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따스한 모습이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파괴되는 전개는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고,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로건>이라는 제목에 담긴 영화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는 우리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야수처럼 맹렬하게 싸우고, 시니컬한 농담을 던지는 그런 울버린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을 맞아 자연히 늙고 더 이상 히어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든 로건이 명예롭게 퇴장할 수 있는 작품이자(이는 프로페서 X, 찰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장을 마련해주는 영화다. 그래서 작중 로건은 그 어느 때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하다. 로건의 회복력은 너무나도 느리고,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해치는 꿈을 꾸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바꿔 말하면 가장 인간적이다. 그를 둘러싼 상황도 절망적이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멘토는 자신을 똑 닮은 복제인간에게 살해당하며 자신의 유전자를 받은 로라는 죽을 위기에 놓인다. 그렇기에 그의 액션은 가장 처절하고, 절박하고 잔인하지만 가장 슬프기도 하다.
결국 로건은 로라를 구해내고, 찰스처럼 죽음을 맞이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리즈를 지탱해온 한 세대가 퇴장하고,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 뒤를 이어받는 것이다. 마치 부모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자식들이 그들의 꿈을 펼치며 새로운 인생을 펼쳐나가듯이. 따라서 <로건>이 선택한 가족, 희생이라는 주제는 기존 엑스맨 시리즈보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결코 더 가볍지는 않다.
5. 로라가 X자로 나무를 꽂으며 끝내는 로건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Johny Cash의 노래와 OST가 들려오며 <로건>도, 휴 잭맨의 울버린도 그 기나긴 여정을 끝마친다. 그러나 이 여정의 끝이 비록 슬프고, 안타깝고, 아쉽더라도 후회가 남지는 않는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로건>은 울버린이라는 히어로, 아니 그 이전에 로건이라는 인간이 겪은 아픔, 슬픔, 후회, 미련, 고통을 온전히 느끼며 그를 떠나보내야만 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감정적으로 납득시키며,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로라'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휴 잭맨의 마지막 울버린 영화 <로건>은 말 그대로 감동적이며, 명예롭고, 품격 있는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