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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Nov 19. 2021

<디어 에반 핸슨> 조각내면 따뜻하고 함께 보면 불쾌한

<디어 에반 핸슨>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소년 '에반 핸슨(벤 플랫)'은 치료의 일환으로 매일 같이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며 어제보다 나은 하루를 꿈꾼다. 어느 날 별다른 관계가 없던 동급생 '코너 머피(콜튼 라이언)'에게 편지를 뺏긴 에반은 며칠 뒤 코너가 자살했음을 알게 되고, 코너가 가져간 편지를 유서로 오해한 코너의 부모를 만난다. 에반이 코너의 절친이라고 생각한 '신시아(에이미 아담스)'는 아들과의 추억을 들려달라며 에반에게 부탁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 주길 절실히 바라던 에반도 그녀의 따뜻함에 놀라 얼떨결에 코너와의 우정과 추억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내며 큰 감동을 안긴다. 그러나 우연과 선의의 거짓말이 나날이 커져가고  에반 스스로도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가려져 있던 진실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71회 토니상에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최고의 뮤지컬상을 포함 6개 부문 수상해 브로드웨이를 휩쓴 동명의 뮤지컬을 영상으로 옮긴 <디어 에반 핸슨>은 뮤지컬 영화 중에서도 독특한 포지션에 위치해 있다. 최근 년간 큰 성공을 거둔 <라라랜드>, <위대한 쇼맨> <알라딘>과 같은 작품에기대할 법한 시원한 노래와 화려한 춤과 퍼포먼스가 등장하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디어 에반 핸슨>에는 춤추는 장면이 거의 없고, 삽입된 노래 역시 서정적인 멜로디에 대화 내용을 그대로 옮긴 듯한 가사가 붙은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현실에서 음악으로 넘어가는 간극이 줄어들어 현실적인 느낌이 상당하다. 시청각적 쾌감을 가능한 배제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감정선에만 오롯이 집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작 주인공인 에반 핸슨의 이야기가 좀처럼 노래의 감정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영화의 특징과 방향성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디어 에반 핸슨>의 서서는 크게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에반이 코너와 엮이고 그와 절친 사이였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사건이 커지는 내용이고, 후반부는 그 거짓말로 인한 부메랑을 에반이 책임지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다. 우선 전반부를 보면 에반의 거짓말이 납득 가능한 이유로 시작된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코너와의 행복한 기억을 들려달라는 신시아의 절박한 부탁을 외면하지 못하고 본인이 꿈꾸던 이상적인 친구의 모습을 꾸며내서 그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세상이 나를 잊은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에반과 유사한 상황에 처한 경험이 있거나 상상할 수 있다면 이 첫 번째 거짓말에는 충분한 공감할 여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에반의 거짓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순간 이해와 공감은 직관적인 불쾌으로 바뀐다. 죽은 이의 존재와 과거를 자신의 희망과 목적에 맞도록 꾸며내는 에반의 행위는 마치 코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으며, 이는 도덕 윤리적으로 어떤 정당성도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쇄적인 거짓말에 지치고 부담을 느낀 에반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딱히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불편함을 강화한다. 즉, 에반의 거짓말이 탄로 나면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까 궁금해지는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기에 앞서서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조차 마련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죽은 너의 영혼이 에반에게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을 통해 에반의 행동에 최소한의 정당성을 부여한 원작을 잘못 각색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독립적인 노래로서는 충분히 감동적이고,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될 정도로 강렬한 뮤지컬 넘버의 감정선 역시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멜로디만 들으면 몰라도 가사의 내용을 함께 보는 순간 좀처럼 에반에게 몰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If I Could Tell Her'라는 넘버에서 에반은 "내가 그녀에게 내가 본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녀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말할 수 있었더라면"이라고 노래한다. 본래 이 노래는 오빠인 코너를 싫어하던 동생 '조이(케이틀린 디버)'에게 에반이 코너를 대변해 가족으로서의 애정을 대신 전하는 명장면이다. 그런데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에반과 코너 사이에 접점이 전무하기에 이 장면이 마치 자신의 짝사랑을 여동생을 향한 애정인 척 속여서 전하는 사기극처럼 보다. 이는 전반부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You Will Be Found'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코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고 외치는 에반의 추모사가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후반부도 다르지 않다. 에반은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일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자 머피 가족에게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한다. 그런데 이때 영화는 지나치게 에반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으면, 오죽했으면 저런 선택을 했을까'라면서 철저히 감성에 호소하고 관객 모두를 그의 개인적인 아픔에 공감시키려고 한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상처나 슬픔은 에반이 느꼈을 괴로움에 비할 수 없다면서 그를 위로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러한 인위적인 후반부의 전개도 에반의 노래에 좀처럼 몰입할 수 없게 만드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에반의 거짓말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다름 아닌 머피 가족이다. 아들과 오빠가 자살한 것만으로도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와중에, 에반의 거짓말이 얼마나 큰 배신감과 충격이 되었을지는 말로 다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사건의 진실을 엄마인 '하이디(줄리언 무어)'에게 털어놓은 에반에게 그녀가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는 것과 달리 이 가족들의 내면을 충분히 묘사하지 않는다. 충격을 받은 듯 보이다가 이내 에반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주며 마지막에는 그의 성찰과 성장을 격려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이었음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코너의 자살을 두고 노래 한 곡을 할애해 복잡한 양가적 감정을 보여줬던 이들이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는 것은 기계적인 전개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물론 <디어 에반 핸슨>의 구성을 하나씩 나누어보면 노래만큼이나 좋은 점이 다. 우선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메시지만큼은 분명 따뜻하다.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하지 않을 거 같을 때,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주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바라지만 두려움이 앞서서 사람들을 밀어내던 에반. 그가 원하던 것은 거짓말로 얻어지지 않았다. 대신 코너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 그가 좋아했던 책을 구해 읽었던 것처럼 본인이 먼저 타인에게 다가설 때 비로소 다른 이들도 에반을 알아봐 준다. 또한 전교회장인 '알라나(아만들라 스텐버그)'가 아무도 래 약을 복용하고 있었던 것처럼 누구나 정신적으로 힘들 수 있고, 그 고통을 숨긴 채 살아가는데 이를 감추지 말고 함께 힘을 합쳐서 이겨내자고 말하기도 한다. 시동을 거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브레이크를 밟아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브레이크를 밟은 이들이 있다면 그들의 브레이크를 함께 풀자는 것. 그 누구도 마다할 수 없는 이러한 메시지는 그 자체로 분명 큰 위로가 된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힐링의 메시지단편적이라서 작품을 관통하는 인상을 주지 않을 뿐이다.


이에 더해 가능한 많은 약자와 소수자, 아픈 이들을 보듬어 안으려는 야심 찬 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만연한 여러 가지 편견을 정면으로 깨부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편부모 가정인 에반의 가족과 부모가 모두 있는 머피 가족을 대비시키면서 부모의 유무보다 부모와 자녀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가치임일깨운다. 또 머피 가족에서아버인 '래리(대니 피노)'가 양부였음을 보여주면서 재혼 가정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파괴하고자 한다. 슬픔을 달래고 애도하는 방식의 차이에서도 누군가는 부정하고, 누군가는 뒤늦게 상실감을 깨달을 수도 있다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 정해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목에서는 왜 줄리언 무어와 에이미 애덤스라는 배우가 필요했는지 알 수 있다. 그저 심금을 울릴 메시지와 다양한 시도가 각본과 주인공 캐릭터 문제에 가려진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캣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매체가 바뀐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내포한다.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힘을 줘서 서술해야 할 내용이 매체의 표현 양식과 특징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당장 뮤지컬은 무대에서는 배우의 표정 보다도 제스처가 더 큰 인상을 줄 수 있고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순간의 인상이 관객에게도 중요할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배우의 표정 하나하나를 통해 세밀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 차이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더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각색까지 고려하면 매체의 변화, 특히 영화로의 변화는 설령 원작이 아무리 뛰어나고 인기가 많더라도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 몇 년 간 브로드웨이 최고의 화제작이자 흥행작 중 하나였던 <디어 에반 핸슨> 끝나지 않을 할리우드의 영화화 실패의 흑역사에 한 줄을 추가한다.


 

D(Dreadful, 끔찍한) 

내용과 가사를 모를 때 더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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