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자연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연속선상에 놓고 보는 아날로그적 시각과 세계를 임의적으로 분류해 해석하는 디지털적 시각이 그것이다. 이 중 사람들은 디지털적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디지털적 시각은 흔히 0과 1로 대변되는, 이항대립적인 요소들로 세상을 나누어 바라보는 방식이기에 이를 통해 세상에 간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 간의 관계를 애정과 증오로 분류하면 이해하기 쉽지만 두 감정이 공존하는 애증의 관계로 바라보면 이해하거나 분석하기 힘들어지는 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영화 역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적 관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영화는 본질적으로 내러티브 상 갈등의 구도를 명확히 해야 스토리의 전개나 메시지의 전달이 용이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두 극의 대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이러한 영화라는 미디어의 디지털적 성격을 웨스턴 장르가 대변했다면, 현재에는 슈퍼히어로 영화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히어로와 빌런의 선 대 악의 대립 구도가 강할수록 히어로의 승리에서 강한 희열이 느껴지는 것은 모두가 경험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하지남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며 양극의 중도를 선택한 영화가 있으니, 그 영화가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다.
2. <다크 나이트>의 축을 이루는 인물은 빌런인 조커, 히어로인 배트맨/브루스 웨인, 그리고 선역에서 빌런으로 전향하는 투페이스/하비 덴트 총 3명이다. 이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두 개의 축인 선과 악의 대립 안에서 각자의 영역을 대변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우선 조커는 <다크 나이트>의 메인 빌런이다. 그는 쉽게 이야기해서 '순수한 악'의 화신이다. 다른 히어로 영화의 빌런들과 달리 그에게는 뚜렷한 동기도 사연도 없다. 단지 '선'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타락시키겠다는 '악' 그 자체로서의 목적만 존재한다. 그렇기에 마피아들처럼 돈을 중요시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악'에서 비롯되는 쾌감을 즐기며 혼돈과 무질서의 상징이다.
그런데 조커가 '악'을 실천하는 방식이 독특한데, 그는 그의 피해자들에게 항상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하나의 극한과 또 다른 극한을 선택지로 들이미는 식이다. 하비 덴트와 레이첼 도스 사이에서 선택하는 배트맨, 페리를 폭파시키는 것을 두고 고민하는 범죄자와 일반 시민들, 고담 병원과 콜먼 리즈 사이에서 갈 길 잃은 고담 경찰들, 그리고 조커를 두고 죽일지 살릴지 선택해야 하는 배트맨.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에게 '악'이란 극한의 대립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담에는 순수한 선을 상징하는 하비 덴트와 배트맨이 존재하니, 그에게 고담은 천국과도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개봉 후 놀란 감독은 베인의 등장 이후 조커가 감옥에서 나오지 않고 머물렀을 수도 있다고 인터뷰한 바 있는데, 베인이 장악한 고담에는 더 이상 선과 악의 대립이 없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3. 고담의 떠오르는 스타 검사, 하비 덴트는 반면에 조커와 정반대에 (심지어 배트맨보다 더!) 위치한 인물이다. 그는 법과 질서를 통해 혼돈을 막으려는 '순수한 선'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두고 고민하던 배트맨이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던 이유도 그가 고담에 존재하는 악과 정반대에 있는 순수한 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조커와의 만남 이후 '운'에 따라 타인의 생명을 결정짓는 살인마, 투페이스로 탄생하게 된 것은 순수한 악과 순수한 선의 대립은 그 의도나 목적이 달랐을지 몰라도 결국 그 결과물과 과정은 닮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차를 쫓는 개처럼 자신이 믿는 신념만을 믿는 광신도라는 점에서 선이든 악이든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영화 속 조커의 은행 강도 시퀀스나 하비 덴트의 법정 씬들을 보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조명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다크 나이트>는 전체적으로 영화의 조명이나 톤이 낮의 밝음 혹은 밤의 어두움 두 가지밖에 사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뽑는 배트맨이 조커를 취조하는 씬도 마찬가지로 극적인 조명의 변화와 대비가 사용된 장면이다. 이는 순수 선과 순수 악의 대립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멋진 연출이자, 조커나 하비 덴트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 그들이 모두 디지털적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영상으로 제시해 직관적으로 영화의 이해를 돕는 장치이기도 하다.
4. 그리고 <다크 나이트>에는 우리의 배트맨, 브루스 웨인이 있다. 그는 조커와 하비 덴트 사이에 위치한 인물로, '중간 악' 내지는 '중간 선'을 대변한다. 그는 고담의 범죄자들을 처리하고 깨끗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선한 의지와 목적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사법체계와 질서를 무시하는 자경단으로서의 활동을 배경으로 한다 (물론 브루스 웨인으로서 기부와 경영을 통한 선행도 하지만). 그는 다른 시민들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으며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기에 '중간 악'이다. 하지만 아무리 폭력을 행사해도 살인은 하지 않으며, 설사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더라도 그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중간 선'인 셈이다. 이처럼 선과 악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는 세상을 분절시켜 극의 대립으로 이해하지 않는, 주인공 3명 중 유일한 아날로그적 인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작중 유일한 아날로그적 인물이 바로 '히어로'라는 점이 <다크 나이트>가 진짜 전하고 싶던 메시지이기도 하다.
배트맨은 선과 악 사이에서 고뇌하고, 번민하고, 갈등한다. 하지만 그는 하비 덴트처럼 완전한 악의 길로 빠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악을 접하고, 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조커의 설득과 위협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규칙과 질서를 지켜내며, 스스로 주인공이 되지 않더라도 고담을 위해 필요한 과업(혹은 누명)을 도맡는 언성 히어로, '다크 나이트'로 태어날 수 있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가짜 배트맨들이 결국 진짜가 될 수 없었던 이유도 그들은 배트맨처럼 양 극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받는 한이 있어라도 중심을 지키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트맨은 결국 아날로그적이기에, 아날로그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조커처럼 고담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하비 덴트가 하지 못한 진정한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배트맨뿐만이 아니다. 범죄자들도, 경찰들도, 시민들도 끝내는 희생을 감수하는 '영웅적인' 선택을 내리는데 이러한 장면들이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5. <다크 나이트>는 이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대립을 다루는 영화로, 작품의 메시지는 이 영화의 촬영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굳이 아날로그 아이맥스 필름을 이용해 액션 시퀀스를 촬영하고, 트레일러 트럭을 실제로 전복시켜 가면서 영화를 제작한 것 역시 배트맨이라는 인물을 잘 드러내기 위한 수단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크 나이트>는 흔한 히어로 영화와는 다른다. 선과 악의 대립이 명확하지 않으며, 선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기는커녕 패배할 뿐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선과 악의 사이에서 고뇌하고, 번민하고, 갈등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진정한 영웅의 상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읽는 방식에 대한 고찰까지 스크린에 구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많은 슈퍼 히어로 영화가 나와도, 심지어 <어벤져스>라 하더라도 <다크 나이트>의 아성을 넘을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다크 나이트>가 삶의 방향성과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은 물론, 영화의 본질에 대한 질문까지 총망라하는 걸작이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