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비극적 순환
1.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독 인간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신이 있다. 바로 프로메테우스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한 티탄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어 문명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인간이 신에 맞서는 방법을 알려준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창조주이자, 피창조물에게 창조의 능력을 주었고, 그 둘의 사이의 긴장감과 대립까지 매개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프로메테우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이기 이전에 '창조주와 피창조물의 관계'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리스 신화가 신(창조주)의 입장에서 인간(피장조물)을 바라보지만, <프로메테우스>는 로봇과 인간(피창조물)의 입장에서 인간과 신(창조주)을 바라본다는 차이가 있을 뿐.
2. 사실 인간이 로봇을 만드는 목적은 신화 속 신들이 인간을 만드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바로 노동력의 확보와 대체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나 그리스 신화에서나 신들은 그들의 모습을 본떠 자신들을 대신해 일을 하고 자신들을 숭배해줄 인간을 만든다. 인간 역시 자신들의 일을 대신할 로봇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창조주들은 자신들의 수고를 덜고 자신들의 문명을 진일보시킬 수 있다. 또한 그렇기에 창조주들은 피창조물들에게 이중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본인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면 그들은 곧 창조주들의 권력과 지위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잠재적인 위협이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는 이러한 이중적인 관계 중 부정적인 면을 '엔지니어'-인간의 관계와 인간-로봇의 관계를 통해 부각한다. 작중 엔지니어는 창조의 이유를 묻는 인간들을 무시할 뿐 아니라 죽여버린다. 인간도 자신을 왜 창조했는지 묻는 '데이빗'에게 합리적인 설명 대신 그의 호기심을 억누르는데 급급하다. 창조주가 자신보다 하위 존재인(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피창조물에게 권력을 내주지 않으려는 시도인 셈이다.
3. 창조자들의 우려는 곧 자신들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피창조물들도 언제 간 '창조'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가 바로 데이빗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것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휴머노이드로, 인류 문명의 총체(영화, 그림, 음악, 언어, 스포츠 등)를 구사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들이 자신들의 창조주를 궁금해하고, 그 목적을 알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데이빗 자신도 인간이 왜 자신을 만들었는지 또 본인도 누군가를 창조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데이빗은 엔지니어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 때 사용한 방식으로 인간이 로봇을 만들 듯,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로 한다. 그 생명체가 바로 에이리언이다. 우리가 에이리언을 보면서 공포심을 느끼고 그 생명체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이렇게 밝혀지는 것이다. 에이리언은 단순히 그 외피로 인해서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니다. 에이리언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은 단지 그 외피가 아닌, 그 생명체의 기원과 속성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안에 담긴 데이빗의 의도가, 창조주에 도전하는 피창조물의 노력이 담겨있기에 두려운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에이리언이 탄생한 장소가 탁월한 비주얼리스트인 리들리 스콧이 창조해낸 황량하고 거칠고 공허하고 거대한 외계행성이라는 사실은 특히나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하는 태곳적 우주로의 경외심과, 기원적 공포심인 코스믹 호러가 결국 창조주와 피창조물의 대립이라는 메타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로 전혀 다른 제목을 가진 <프로메테우스>가 필연적으로 제작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4. 따라서 <프로메테우스>는 기존의 시리즈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인류의 수많은 신화를 한 번에 묶어내는 용감한 도전을 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심오한 주제의식과 뛰어난 '데이빗'의 캐릭터성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다른 요소들이 이를 받혀주지 못하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개연성 상실하는 수많은 대목은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헤치기까지 한다. 대기 중 성분을 알지도 못하면서 헬멧을 벗는 과학자나, 마음대로 통제를 벗어나는 초등학생 같이 해동하는 탐사대원들의 모습은 인류 탄생의 비밀을 밝히는 중차대한 임무와는 조화를 이루려야 이룰 수 없고,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엘리자베스 쇼'와 '데이빗'을 제외하면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없다는 것, 즉 영화가 등장인물들을 도구적으로 대할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며 새삼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을 수 있는 아쉬운 대목일 뿐이다. 사실 이 단점들은 <프로메테우스>라는 독립적인 영화에 과도하게 <에이리언> 시리즈의 요소들을 삽입하는 과정에서 밸런스 조절에 실패한 증거이기도 한데, 리들리 스콧의 욕심이 과했다고 느껴지며 작품의 뛰어난 비주얼과 사운드의 향연을 망칠 뿐이기도 하다.
5. 따라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작품은 리들리 스콧의 작품 중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뛰어난 주제의식에 비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전달 방식을 지닌 작품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빈후드>, <카운슬러>, 후에 제작되는 <엑소더스>와 같은...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근래 보기 힘든 준수한 SF작품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