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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Oct 24. 2022

<블랙 아담>은 사라지고 드웨인 존슨만 남았다

<블랙 아담>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원전 번성했던 고대 국가 칸다크는 현재 국제 군사 조직 인터갱의 독재 국가로 전락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갱의 눈을 피해 고대 유물을 찾던 '아드리아나(세라 샤히)'는 5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전설 속의 구세주이자 챔피언인 '블랙 아담(드웨인 존슨)'을 우연히 깨우고 만다. 마법사 샤잠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괴력과 신체 능력, 마법을 다루는 블랙 아담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인터갱 조직원들을 거침없이 사살하고, 아드리아나의 아들 '아몬(보디 사봉기)'을 포함해 영웅을 기다려 왔던 칸다크 국민들은 그에게 열광한다. 그러나 그가 신적인 능력을 악용할 것을 우려한 '아만다 월러(비올라 데이비스)'와 '호크맨(알디스 호지)'은 '닥터 페이트(피어스 브로스넌)', '아톰 스매셔(노아 센티네오)', '사이클론(퀸테사 스윈델)'과 함께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를 결성해 칸다크로 향하고, 블랙 아담과의 한판 승부를 대비한다. 



히어로 영화 첫 편의 핵심은 정체성 확립이다. 그(녀)가 히어로가 된 이유, 가지고 있는 능력, 히어로로 성장하는 과정과 마주한 숙명을 압축적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줘야 한다. 데뷔작이 이 과제를 잘 수행해낼 경우 박쥐나 가슴팍의 S 문양, 방패, 망치, 슈트 등의 상징에는 한 히어로의 모든 정체성이 집약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새로운 마법사 히어로의 기원을 다룬 <블랙 아담>은 성공적인 상업 영화, 오락 영화, 킬링타임 영화일지는 몰라도 성공적인 히어로 영화는 아니다. 실제로 <블랙 아담>을 보고 나면 잭 스나이더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화려한 액션씬, 거대한 벽과도 같은 드웨인 존슨의 이미지, 그리고 속편을 기대케 하는 쿠키영상만이 뇌리에 남는다. 달리 말해 블랙 아담의 영웅성을 각인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 결과 슬로 모션과 액션의 홍수, 신화적 이미지로 중무장한 비주얼을 빼면 <블랙 아담>은 수많은 히어로 영화 중 하나에 불과한, 무색무취한 작품에 불과하다. 


블랙 아담의 정체성은 크게 세 가지다. 칸다크에 자유를 가져올 구세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규정할 수 없는 안티히어로, 슈퍼맨에 비견되는 초인. 영화는 세 정체성을 블랙 아담과 다른 캐릭터 간의 상호 작용 속에서 풀어내고자 한다. 칸다크의 메시아라는 정체성은 칸다크의 국민인 아드리아나와 아몬과의 관계, 그리고 블랙 아담의 가족사로 설명된다. 독특한 역사와 정치적 상황에 놓인 칸다크의 상황도 블랙 아담이 챔피언이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더해준다. 한편 안티히어로로서의 정체성은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라는 히어로 팀과의 만남을 통해 두드러진다. 마지막으로 지구를 위협할 초인으로서의 능력은 빌런인 사박을 비롯해 다양한 적들과의 액션씬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블랙 아담>은 세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정체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우선 블랙 아담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한 국가의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블랙 팬서가 와칸다의 수호자인 것처럼, 블랙 아담은 칸다크를 구원할 챔피언이다. 이 대목에서 블랙 아담의 캐릭터성은 두 가지 방면으로 풍부해질 수 있다. 우선 익숙한 구세주 내러티브를 역이용해 블랙 아담만의 차별화된 개성을 확립하는 길이 있다. 블랙 아담은 여러모로 히브리족과 유대인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나 예수와 닮아있지만, 동시에 결정적인 차이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일례로 칸다크가 지중해 연안 중동 국가처럼 묘사되는 것이나 블랙 아담이 노예 생활 중인 이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것은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반면에 블랙 아담은 신과 모세, 성부와 성자 중 아들이 구원자가 되는 기존 신화적 내러티브를 따르지 않는다.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아들이 자기희생 하는 이야기를 답습하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아들을 잃고 분노한 아버지가 복수를 위해 메시아가 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특히 영화의 쿠키 영상은 블랙 아담의 정체성을 더 강조한다. 외계인 아버지인 조엘과 지구인 아버지 조나단 켄트의 밑에서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난 슈퍼맨은 야훼와 요셉 밑에서 자란 예수의 DC 버전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런 슈퍼맨과 블랙 아담을 대조하면서 DC 유니버스 내에 블랙 아담을 위한 자리를 확실히 마련하려 한다. 


한편 정치적 맥락에서 블랙 아담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길도 있다. 칸다크의 외관이나 위치, 묘사 등은 칸다크가 중동 국가들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근거가 된다. 칸다크를 지배하는 인터갱의 존재도 알카에다, 탈레반, ISIS 등 여러 테러 조직을 연상시킨다. 이 경우 칸다크의 자유는 단지 무장조직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현재 중동 지역의 여러 갈등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의 개입에 의한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독립을 약속했던 영국이 무책임하게 중동에서 철수했던 것처럼. 그렇기에 칸다크의 자유는 곧 서구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미국 정부와 협력하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에게 칸다크 시민들이 야유하는 것, 그들이 칸다크 문제에 개입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것, 결국 칸다크 출신의 블랙 아담만이 빌런인 사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것 모두 역사적, 정치적 메타포다. 



하지만 이 모든 가능성은 무위에 그친다. 블랙 아담은 단순히 강력한 초인으로 거듭날 뿐, 그와 칸다크의 직접적 관계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가 현대 칸다크의 자유 지도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할 때 설득력이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단 칸다크와 관련된 배경이나 상징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 예를 들어 자유를 상징하는 삼각형의 의미와 중요성이 분명하지 않다. 삼각형 표시 하나가 어떻게 오랜 기간 통치자에게 굴복하고 있던 칸다크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각성시킬 수 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헝거게임> 속 세 손가락 경례와 대조를 이룬다. 작중에서 그 의미가 반복적으로, 또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제시된 세 손가락 경계는 스크린 너머의 현실 세계에서도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감안하면 <블랙 아담>의 표현 방식은 피상적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작중 인터갱의 위상 역시 명확하지 않다. 도로를 검문하는 모습 외에 그들의 강압적 통치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결과 인터갱에 저항하는 칸다크 시민들의 모습은 갑작스럽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크-톤 왕의 왕관을 노리는 구체적인 이유나 음모가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갱은 그저 주인공들의 보물찾기를 방해하는 전형적인 악역 집단에 불과해 보인다. 결국 인터갱과 대립하며, 자유의 상징인 블랙 아담의 존재감과 지위에도 악영향이 간다. 이 단점은 <블랙 팬서>와 비교할 때 더욱 눈에 띈다. <블랙 팬서>는 와칸다라는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블랙 팬서와 킬몽거 간의 대립을 통해 미국 내 흑인의 정체성과 문화, 흑인에 대한 차별과 동포 의식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 바 있다. 가상의 배경에서 현실적 메시지를 내포한다는 공통점에 비해 스토리텔링의 디테일이 아쉬운 지점이다.


칸다크 시민들을 대변하는 아몬의 행적도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아몬은 블랙 아담과 현대 칸다크 간의 가교로서 블랙 아담이 칸다크의 수호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블랙 아담의 과거사를 제외하면 그들이 유달리 특별한 감정적 유대감을 갖게 되는 이유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인이 이순신을 만나는 것처럼 아몬이 흥분했다는 점은 유추할 수 있으나, 칸다크에 대한 부실한 묘사는 그의 감정선을 온전히 전해주지 않는다. 그들의 직접적 상호작용이 드웨인 존슨의 반어적 유머로 점철되어 비교적 가볍게 느껴지는 것도 이유다. 또 아크-톤 왕의 왕관을 찾는 아드리아나의 당위나 동기가 제시되지 않다 보니 왕관을 매개로 블랙 아담과 얽힌 이후 이들의 행적은 적잖은 비중에 비해 개연성이 부족하며 어색하다. 그로 인해 챔피언으로서의 블랙 아담의 캐릭터성은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는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의 대립을 통해 선 또는 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안티히어로 블랙 아담을 보여주려는 시도도 불완전하다. 히어로 영화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결국 수단과 목적 사이의 딜레마에서 비롯된다. 히어로는 대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초월적 능력이라는 수단을 어디까지 활용할지,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윤리적, 도덕적 제한 없이 초월적인 힘을 써도 될지 고뇌한다. 이때 살인은 가장 상징적인 기준선이다. 즉 불살은 최소한의 선으로 히어로의 수단과 목적 모두를 정당화하는 최후의 기제로 여겨진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와 블랙 아담의 대립도 마찬가지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히어로의 능력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으며 살인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정의라고 말한다. 반대로 블랙 아담은 강한 능력이 주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고, 그 힘을 온전히 활용해 주어진 소명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살인 행위를 옹호한다.  


그러나 <블랙 아담>은 호크맨과 블랙 아담 충돌 같은 정의관의 차이를 드웨인 존슨 스타일의 비꼬는 유머 안에서 다소 가볍고 피상적으로 그려낸다. 그 결과 그들의 대립 그 자체가 갖는 무게감이나 상징성은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없다. 칸다크의 자유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결과 블랙 아담이 마법사에게 받은 능력을 사용하는 정당성도 와닿지 않는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도 문제를 키운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도 이번에 처음 등장한 관계로 영화는 블랙 아담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벅찬 와중에 멤버 4인 간의 서사도 다루어야 한다. 호크맨과 닥터 페이트의 깊은 우정, 사이클론과 아톰 스매셔의 하이틴 로맨스 등이 삽입되면서 스토리라인은 더 복잡해진다. 그러니 블랙 아담과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대립은 필요한 만큼의 비중과 분량을 받지 못하고, 추상 수준 역시 자연히 얕아진다. 


닥터 페이트의 존재감이 주인공인 블랙 아담 이상으로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의 문제다. 인물 간의 대립에서 근본적 의미가 느껴지지 않기에 갈등 구도에 무게감을 더하거나 상황을 전환할 수 있는 캐릭터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정의관의 차이를 잠시나마 일단락하고 블랙 아담을 각성시킬 수 있는 닥터 페이트의 능력과 현자로서의 품격은 더욱 두드러진다. 동시에 슈퍼맨과의 대결을 암시하는 쿠키 영상이 선악의 대결보다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두 초인의 대결을 암시하는 듯한 표면적인 의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블랙 아담의 데뷔작이라는 면에서 이는 결코 긍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결국 블랙 아담은 안티히어로로서의 정체성도 미처 확립하지 못한 채 강력한 초인이라는 이미지에 갇히고 만다. 



결과적으로 블랙 아담의 정체성을 다른 인물들과의 접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 노력은 성공에 다다르지 못했다. 상호작용이 작위적이거나, 설명이 부족하거나, 이야기를 심도 있게 풀어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괴력의 마법사라는, 드웨인 존슨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차용한 듯한 정체성만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달리 말해 화려한 액션만이 서로 다른 이야기에 비주얼적으로 통일성을 더하며 일관적인 톤을 유지하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물론 이 매력 덕분에 <블랙 아담>이 나름 볼만한 상업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금 세계관을 살려보려는 DC 유니버스의 새로운 초석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히어로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블랙 아담>의 의의는 관심의 불씨를 그저 유지하는 데에 국한되고 만다. 



A(Acceptable, 무난함) 

화려한 출발 혹은 불안한 기초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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