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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Jun 12. 2019

로켓맨

가면이 내 얼굴인지 내 얼굴이 가면인지

1. 독일의 유대인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현재 우리가 매우 익숙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중 몇 가지를 처음으로 주장한 바 있다. 바로 페르소나와 콤플렉스다. 이 둘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그리고 한 개인의 행위와 그로부터 촉발될 사회의 변화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아와 무의식이라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힘이다. 융은 독특한 상황에 맞춰서 개인이 선택하는 사회적/심리적 정체성을 페르소나라고 이야기하며, 페르소나는 사회적 기대와 개인의 욕망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한편 콤플렉스에 대해서는 누구나 무의식 중에 존재하며 개인의 심리에 영향을 주는 내면적 힘이라고 이야기하며, 그 범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차원에까지 이른다고 주장했다.


 

2. 태런 에저튼 주연의 <로켓맨>은 이러한 융의 페르소나와 콤플렉스 개념이 내러티브 전면에 스며들어있는 영화다. 아버지의 꾸지람과 어머니의 부주의한 행동 하나가 어떻게 한 개인의 콤플렉스를 탄생시켰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할머니의 따뜻한 격려 한 마디와 애인의 냉정한 반응 한 번에 한 개인이 자아와 페르소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고뇌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로켓맨>은 '레지널드 드와이트'의 콤플렉스가 어떻게 '엘트 존'이라는 페르소나를 탄생시키고 파괴하는지를 다룬 작품인 것이다.  



3. 이러한 엘튼 존의 복잡한 내면은 뮤지컬의 형식으로 제시된다. 엘튼 존의 유년기부터 그가 애정결핍에 시달리게 된 계기, 인간관계가 그의 콤플렉스가 된 이유, 그가 엘튼 존이라는 페르소나를 만들고 레지널드와 엘튼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 등이 마치 뮤지컬 넘버처럼 엘튼 존의 노래들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단지 엘튼 존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의 내면도 노래를 통해 제시되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하며 흥미롭게 극을 따라갈 수 있다. 또한 뮤지컬의 무대 연출을 따라가는 연출을 통해서 동성애, 마약, 알코올 중독 등 다소 민감할 수 있는 문제들까지 엘튼 존의 개인사라는 큰 내러티브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기도 한다.


사실 <로켓맨>은 전체적인 소재와 형식에 있어서 유사한 <보헤미안 랩소디>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하지만 <로켓맨>과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화의 완성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매끄럽지 못하며, 단지 후반부 라이브 에이드 시퀀스 퀸의 노래가 갖는 힘을 빌려 내러티브를 간신히 마무리했을 뿐인 영화다. 반면에 <로켓맨>은 <보헤미안 랩소디>가 그려내지 못한 팝스타의 이면, 일반 대중이 알 수 없는 내밀한 속사정을 드러내면서 엘튼 존이 슈퍼스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불행했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데 성공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의 관음증적인 본질을 <보헤미안 랩소디>보다 <로켓맨>이 더 잘 구현해냈고, 덱스턴 플레처 감독이 진짜 원하는 영화는 <로켓맨>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4.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영화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로켓맨>보다 <보헤미안 랩소디>에 사람들이 더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아마 영화 속 엘튼 존의 말처럼 <로켓맨>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본래 영화가 관객 입장에서 수동적이고 일방향적인 예술이었다면, 근래에는 영화를 본다는 경험이 더 적극적이고 쌍방향적인 관계로 변화하고 있는데 <로켓맨>은 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관객들은 단지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 안팎에서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하고(싱어롱 버전 상영이 이루어지거나 확대되는 이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SNS 혹은 이른바 영혼 보내기) 영화 제작, 배급, 상영에 관객들의 입장을 반영시키고자 노력한다. 심지어 넷플릭스에서는 이를 반영해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선택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점점 고객의 욕구가 다양해지는 상황에서 영화는 단순한 예술의 범주를 넘어서 관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상품으로써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비록 예술적인 측면에서 완성도는 부족할지라도 퀸의 명곡들을 통해 어떻게든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한 반면, <로켓맨>은 엘튼 존이라는 스타의 개인사를 들여다보는 재미 외에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열광할 무엇인가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 속 엘튼 존의 노래들도 스토리 라인에 잘 들어맞는 명곡이기는 하나 잔잔한 발라드에 가까운 것도 사실이고...



5. 또한 <로켓맨>의 주제는 무겁다 못해 불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로켓맨>은 자신이 꿈꾸는 '엘튼 존'이라는 스타의 모습에 다가갈수록 상처 받고 피폐해지는 레지널드의 모습을 묘사한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그가 끝끝내 힐링받고 성장해서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장면을 기대할 수밖에 없으며, 인물의 성장과 성공은 이러한 영화에서 관객들이 원하는 판타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 10분 여를 제외하면 계속해서 자기 파괴적인 엘튼 존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를 옭아매는 과거를 상기시킨다. 즉 <로켓맨>은 관객들이 <보헤미안 랩소디>로부터 기대하는 판타지와 카타르시스 대신 현재 일상 속에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적 자아로서의 페르소나를 갖추기 힘들고, 과거의 콤플렉스를 털어내기 힘든 스스로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 듯한 불편함만이 가득한 것이다. 특히 개인적 콤플렉스는 물론 역사적, 사회적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이 영화는 소화시키기에 더욱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럼에도 <로켓맨>은 희망과 위로의 노래로 끝나지만, 그 분량이나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를 풀어내는 방식이 2시간 내내 이어진 엘튼 존의 불행한 개인사를 잊게 만들지는 못한다.


결국 <로켓맨>은 예술로서는 준수한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국내에서는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비운의 상품인 듯싶다.



A(Acceptable, 무난함)

영화, 예술과 상품 사이의 괴리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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