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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noDAY Jun 22. 2019

대영박물관

이방인이 접한 영국의 자부심과 치부

1. 우리는 박물관을 왜 갈까? 박물관을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학교에서 과제로, 현장 학습으로 가기도 하고 외국으로 여행을 가서 관광지로서 박물관을 접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든 간에 기본적으로 박물관을 간다는 것은 과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굳이 과거의 사건, 과거의 유물, 과거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만나고자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테라 모리스-스즈키라는 역사학자가 쓴 <우리 안의 과거>라는 책에서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다.



2. <우리 안의 과거>는 박물관과 같이 역사적 사건과 같은 과거를 표현하는 미디어를 두고 ‘한순간도 빠짐없이 해석과 동일화 사이에 내재한 밀접한 긴장관계가 담겨 있’게 하는 효과를 준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과거를 접할 때 단지 과거에 대한 지식만을 접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각종 전시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 정서적 공감을 누리게 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지금 살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역사재현물은 단지 과거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정체성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역사적 미디어를 통해 과거를 접한 현재의 수용자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공유하며, 이 정체성은 사회 안에 통일성을 부여해준다.  


박물관이라는 장소 또한 역사재현물이자 미디어이고, 그렇기에 한 사회의 통일된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한 국가의 대표적인 박물관을 가보는 것은 종교적 장소를 가보는 것처럼 그 나라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런던에는 세인트 폴 대성당도 있지만, 대영박물관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로제타 석. 이집트의 신성문자,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가 병기된 유물로 고대 이집트어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물이다.


3. 대영박물관은 1759년에 개장한 박물관으로 영국 내부의 유물들은 물론 이집트, 그리스, 중국, 일본, 남태평양 등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의 발길이 닿은 모든 지역의 유물들을 총망라하고 있는 대형 박물관이다. 이처럼 전시품 대부분이 강탈해온 유물들이지만 반환 요구에는 응하지 않고 있기도 해서 논란이 일기도 한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로제타 석, 사자의 서,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물인 엘긴 마블 등이 있다. 2000년부터는 한국관도 개관했고 현재 대한항공의 후원 덕분에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서비스도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사자의 서(좌), 고양이 조각상(우)

방대한 규모로 인해 박물관을 둘러보기에 하루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오디오 가이드를 따라 주요 유물들을 관람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가이드가 시작되는 곳이자 가장 유명한 유물들이 많은 이집트, 그리스 관만 관람하는 경우도 많다. 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시작으로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제국 유물까지만 관람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반나절이 걸리기도 했다. 중요도나 규모에 비해 위치가 외진 곳에 있어서, 지하철 역에서 가거나 입구를 찾을 때 시간이 꽤 많이 걸릴 수도 있다.


아메노피스 3세의 두상(좌)과 아시리아 제국의 조각상(우)

대영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학교에서 현장학습을 나온 영국의 중고등학생들, 교수님과 함께 견학 온 대학생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뭇 진지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유럽에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갈 때마다 늘 생각하던 것이지만, 너무나도 부러웠다. 누군가는 책과 교과서에서 나오는 유물과 작품을 보기 위해 수십 만원을 주고 10시간을 넘게 이동해야 하는데 누군가는 학교나 학원을 가듯이 원할 때마다 인류의 결작들을 감상할 수 있다니. 심지어 무료로. 얼마나 큰 행운인지 저 학생들은 알고 있을까... 괜히 질투 아닌 질투를 하기도 했다.  


람세스 2세의 흉상(좌), 네레이드 신전(우)


4. 그렇다면 대체 왜 영국은 국제적으로 비난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저 유물들, 특히 파르테논 신전의 구성품인 엘긴 마블을 대영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을까?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만) 대영박물관이 영국인들이 지니는 과거에 대한 향수, 자부심 그리고 콤플렉스라는 정체성을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라는 점도 한 가지 이유일 듯싶다.


사실 영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외진 유럽, 변방인 지역이었다. 유럽 문명이 뼈대인 그리스 문명과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 문명도 게르마니아 지역을 제외하면 영국에 가장 늦게 전파되기도 했었고, 로마 제국에서 편입된 후로도 산업 혁명이 이뤄지기 전까지 영국은 결코 역사의 중심 무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은 입헌 군주제를 토대로 시민혁명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유산인 민주주의를 도입, 발전시켜 이를 토대로 최강대국을 이룬 바 있다. 또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가 독립 전쟁을 치를 때 많은 청년들이 의용군으로 가담해 그리스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중에는 영국의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G.G. 바이런도 있으며, 그는 그 전쟁에서 죽기도 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여섯 살이 끝난다네

칼, 깃발, 전쟁터

영광과 그리스를, 내 주위에서 보라!

자기의 방패 위에 실려가는 스파르타 인보다

더 자유로운 자는 없다네


그대가 그대의 청춘을 후회한다면, 왜 사는가

명예로운 죽음의 땅이

여기 있다- 전쟁터로 달려가,

그대의 목숨을 바쳐라!


G.G. 바이런, '오늘 내 나이 서른여섯 살이 끝난다네' 中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물들. 이른바 '엘긴 마블'


그렇기에 서양 세계의 기준으로 문명이 시작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거쳐 서구 문명의 근원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이어지도록 짜인 관람 순서는 아마 위와 같은 역사적인 콤플레스와 자부심의 표출이 아닌가 싶다. 역사적으로 가장 외진 유럽, 변방이었던 영국이 그리스의 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고 발전시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가 독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자신감이 발산되는 결과물이 바로 대영박물관인 것이다.     


또 이렇듯 역사적인 자부심과 콤플렉스의 극복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은 비록 그 과정은 다를지라도 우리나라의 국립 중앙 박물관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숱한 외침과 식민지배, 분단, 독재 정권을 맞이하는 와중에도 그 역경들을 극복해낸 자랑스러운 한국사를 관람 중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5. 물론 영국인들도 대영박물관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유튜브 채널 <졸리>의 영상 중에서 제작자이자 출연자인 올리가 '대영박물관이 다 훔쳐왔듯이 말이지'라고 언급하기도 하고 여러 대중매체에서 대영박물관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도둑이다(예를 들어 <블랙 팬서>에서도 대영박물관에 빼앗긴 와칸다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대영박물관은 역사적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현대 사회의 가치관에는 맞지 않는 불편한 장소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장소인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경외심, 호기심, 놀라움과 불편함이 공존했던 대영박물관에서의 시간은 런던에 머물렀던 5일 중 단언컨대 가장 복잡한 경험이었다.


파르테논 신전 페디먼트의 일부


서구의 변방에서 서구의 중심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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