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어른의시대
1편부터 읽어주세요.
몇 년 전부터 MBTI가 엄청 유행했다. 혈액형별 성격 유형처럼 재밌지만 틀린 소리쯤으로 치부되어 금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줄 알았던 것은 그러나 자기소개나 이력서에 등장할 만큼 공신력(?) 있는 무엇이 되었다. 나는 MBTI 성격 유형에 정확히 들어맞는 너무도 뻔하고 전형적인 INTJ(와 ENTJ를 오가는)이므로 이 또한 큰 불만 없이 받아들였으나 문득 이게 현시대 사람 사이에 그어진 선의 문제이자 멀어진 개인 간의 거리를 보여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엔 선이 많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그어 놓은 무수히 많은 선 사이를 다른 사람들이 밟고 넘고 또는 지켜주며 살아가는 시대, 하나의 집단이 아닌 개인들의 집합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여 저 MBTI의 유행은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며 다치고 피곤해지기보다 상대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빠르게 파악하여 내 선을 넘을지 안 넘을지를 미리 견적 내고 싶은 어떤 편의주의적 사고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느낀다.
요즘 어른들이 '너 살이 왜 이렇게 쪘니?', '결혼은 왜 안 하냐?', '애는 둘은 낳아야지.' 등의 말을 하면 질색을 하고 그것 때문에 명절에 내려가기 싫다는 조사마저 나온다. 당연하게 주고받던 '오늘 좀 피곤해 보이시네요.' 같은 말뿐 아니라 '살 빠지신 것 같아요.' , '예쁘세요.' 같은 말조차 어쨌든 상대의 외모를 임의로 평가한 것이므로 실례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3초 룰이라며 상대방이 3초 안에 고칠 수 없는 건 지적하지 말라는 주장도 매우 타당하기까지 하다.
이게 어른 이야기랑 무슨 상관인고 하면, 이제껏 굳건하던 어른의 권위가 흔들리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자주 타인의 선을 무시하고 밟고 넘는 존재라는 점이다. 자신의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다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무례한 말을 할 권리가 생긴다고 여기고, 다른 이의 인생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큰 고민 없이 내뱉는 말들이 너무나 시대착오적이고 폭력적인 데다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사람의 성격을 유형화해서 미리 피하겠다는 시대에 MBTI가 뭐냐고 물어보면 '그게 뭐냐?', '나는 거 뭐시기 cfgh? 그거던데?'라고 대답하며 나보다 더 많은 천부인권을 가졌다는 듯 내 삶을 경계를, 소중한 기준을 마구 넘나드는 존재.
그게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어른'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풍기는 케케묵은 냄새다.
과연, 이 모든 건 요즘 사람들이 네 가지가 없이 태어나서 생긴 일인가. 낡고 귀찮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소중히 보듬고 아껴야 할 전통을 내버리기 시작한 후에 생긴 부작용일 뿐이고?
앞서 밝혔듯 단순히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또 다른 인간에게 존경받을 만하거나 전해줄 지식이 많은 건 아니다. 모두가 같은 마을에서 몇 대째 농사를 짓고 광을 캐고 물고기를 잡을 땐 마을 어르신들의 지식이야말로 돈 주고도 못 사는 귀한 정보였으나 상당수 고향을 떠나 부모 세대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자칭 '어른' 들의 말이 와닿지 않은지 오래다. 그러니 믿고 따르고 존경하고 배울만한 말은 안 하는데, 정작 그 몇몇 어른들은 스스로를 그런 존재라 인식하고 있으니 이건 마치 전혀 안 닮았음에도 차은우를 닮았다고 우기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기도 하다.
결국 이 시대의 어른이란,
자신이 사전적 어른인 이유가 그저 나이를 더 먹었을 뿐이라는 걸 인정하거나,
회사에 먼저 입사하여 상사일 뿐이고, 고른 직업이 선생님일 뿐이고, 계약서 상의 갑을 관계일 뿐이라는 걸 인지하고 정확히 그에 맞는 행위만 해야 하는, 그래야 이치에 맞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공경을 받는 그 '어른'은
그냥 남보다 오래 살아있으면 주어지는 훈장이 아닌,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서 얻어내야 하는 가치가 되었으니 이제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시대가 도래한지도 모른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키우는 자식이 있는 입장에서 어른이 부재한 사회란 얼핏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존경할 만한, 믿을 만한 어른이 없다고 느끼는 젊은 세대들의 마음은 이미 최근 작품에서 드러나는데, 대표적으로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체인소맨'이 거기에 해당한다.
작품 속에서 어른은 착취를 일삼는 존재일 뿐이고, 주인공과 주인공의 주변은 모두 또래 집단이며 주인공은 더 이상 전통적이고 지고한 가치(어른이 가르쳐주신)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자 가슴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거나 뽀뽀를 좀 해보고 싶다는 아주 개인적인 열망을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그런 세상과 주인공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누가 공감하고 재미있게 보겠냐는 걱정과는 달리 나는 꽤 재미있게 봤다.
오히려 비장한 배경 음악과 함께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동료들이 나오는 만화보다 더 공감되었고, 주인공을 가르치고 이끌지만 무례하고 괴팍한 사부(어른) 같은 존재가 없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행동으로 존경을 얻어낸 누군가가 나이와 상관없이 그 이야기 속 어른이 되는 게 더 타당하다고 느꼈으니 스토리의 개연성(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어른이라는 단어를 없애자거나 이제 세상에 어른이란 없다는 등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도움을 구하는 젊은이를 이끌어 줄 어른의 존재는 여전히 너무 소중하다. 그저 유교 문화와 뒤섞여 그 범위와 권한이 확대된 채로 남발되던 어른이 이제 정확히 사전적 의미로 돌아와야 함을 말하는 것뿐이다.
사람은 자기 객관화가 중요하다.
사회생활을 하고 많은 사람을 겪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둥글고 매끄럽게 풍화된 자신의 모습을 나이 들어 현명해진 것이라고 여기거나 젊은 사람보다는 확실히 더 많이 아는 증거라고 자부하는 건 위험하다. 앞으로의 세대에게 더 빨리 닳아버리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게 아닌 이상, 그들에겐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고, 가난이 있고, 고충이 있으며 한 인간이 제 아무리 똑똑하고 이 백 살을 살았다 한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아무도 원치 않는 충고 발사기 같은 건 정말 끔찍하다.
이제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천부인권처럼 누리던 가짜 공경이 사라지고 있으므로, 원래 그래야만 했듯 모두가 서로를 대등한 인간으로 보고 상호 합의한 권한 이상의 위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상대를 존중하면 될 일이다.
몹시도 실현되기 어려운 말이지만, 어쨌든 선 넘지 말란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