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낳아짐을 당했다는 시대

효도의 종말

by 강우

반 출생주의(anti-natalism)


출산을 ‘반대’하는 관점으로, 존재의 고통과 불행을 근거로 출산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

논의는 윤리적 책임, 행복, 인구 과잉 등 다양한 근거로 전개.


효도


1. 명사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

2. 명사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일.



초등학교 시절(사실 국민학교를 다녔다), 나는 어버이날이 되면 늘 부모님께 삐뚤빼뚤한 글씨로 편지를 썼다.

학교에서 수업을 한 시간쯤 빼가며 편지 쓰기와 카네이션 만들기를 시켰던 탓인데,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라는 말이 만수무강쯤으로 바뀐 적은 있어도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만큼은 늘 그대로였다.


그땐 뭘 그리 감사할 분들이 많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은혜까지 울려 퍼져야 비로소 5월이 끝이 났다.

'고맙게 베풀어 주신 신세나 혜택'이라는 뜻의 '은혜'가 1년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달이었다.

하도 은혜 타령을 해서 종교도 없는데 인간은 모두 은혜(이번엔 하나님 또는 부처님의 은총이라는 뜻)를 받은 존재라는 건가 싶었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


당시엔 그 의미를 곱씹어본 적도 없었다.

진짜 감사한지 안 한 지, 누가 나를 세상에 낳아놨다는 게 애초에 감사할 일이거나 은혜이긴 한 건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삶에서 즐겁고 행복한 순간은 찰나이고, 대부분은 그저 해야 해서 하는 일의 반복이거나 괴롭고 슬프기까지 하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그냥 살았으니까.

그땐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사는 게 좋은가?'라는 질문은 다들 공부하기 싫어서 지껄이는 사춘기 헛소리쯤으로 여겼으니까.


내가 존재함을 감사드려야 한다고 배우는데, 내가 존재하고 싶은지에 대한 물음은 금지된 시절.

눈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얻어맞고도 스승의 은혜를 부르던 유교적 야만의 시대였다.


그런데 지금, 내 아이를 낳고 보니 저 말이 매우 무겁게 느껴진다.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사실 부모가 아이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노후 대책용 가스라이팅처럼 남발하기엔 너무 소중한 말이다.


거창하게 '지구가 아파서' 같은 이유를 댈 필요도 없다.

무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인 나라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초1이 한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아이에게 지적 장애가 있는 게 아니냐는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그 사실이 속상한 만큼이나 수치스러워서 아이를 윽박지르던 나는 몹시 불행했다.


그런 나를 보며 내 아이는 낳아져서, 살아서 좋았던가?




예나 지금이나 가정의 달은 붕 뜨고 피곤하다.

심지어 이제 중간에 딱 끼인 나이가 되니 어린이날도 두렵고 어버이날도 두렵다.


재미있고 특별한 어린이날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는 아이도 무섭고, 맡겨 놨던 것을 찾아가듯 당연하게 요구받는 효도도 무섭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또 키워주신 '은혜'도 모른다며 근본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짜증 난다.


그놈의 효도.

이 부모를 잘 섬겨야 한다는 논리의 근간에는 부모가 나를 낳아주셨기 때문이라는 매우 간단하고 강력한 명제가 자리한다.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이니 어찌 보면 내 존재 자체를 빚졌다는 말인데, 이건 뭘 어떻게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거대한 은혜여서 자식은 어느 순간부터 늘 (옆 집 자식에 비하면) 죄인이다.


하지만 제법 불행했던 10대와 20대를 보내며 부모님과 서로의 밑바닥을 공유한 나는 '효도하지 않는 나'에 대한 죄책감은커녕, 이젠 천륜이라는 말조차 우습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인생의 선택들을 가지고 남(부모) 탓을 하진 않지만, 언젠가부터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게 아닌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든 고통의 시작이 아닌가 싶은 건 사실이다.

그리고 내 가정을 이루고 문제없이 행복하게 사는 지금도 나 자신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았다는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사는 게 고통인 사람에게 낳아줬으니 보답하라는 것만큼 와닿지 않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태어나는 건 선택하지 못했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고를 수 있기를 바라는 나에게 효도란 마치 내가 원치 않는데도 흠집 난 물건을 안겨주고 비싸게 다시 되갚으라고 우기는 그런 빚쟁이를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런 내 감상이 인간을 혐오하고 부정적이며 매우 개인주의자인 나 한 사람의 특이점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몇 년 전까진 비슷한 말만 꺼내도 병원을 좀 다니라든가 너 같은 애들 때문에 아이 낳기 무섭다는 말도 들어봤다. (참고로 너 같은 애들 타령하는 아가보단 내 나이가 더 많았고, 당시 이미 아이도 있었다)


부모랑 사이가 안 좋다고만 해도 우리 땐 다 그러고 컸다느니,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 최선을 다한 거라느니, 심지어 내 말하는 꼴을 보니 참 유별나고 지랄 맞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자기가 더 불행했는데 이제 아침 5시에 일어나는 힘찬 삶을 살고 있다며, 밖에 나가 걷거나 땀이 날 만큼 운동을 하면 부모를 이해하고 효도하게 된다는 '이상한 불행 배틀+자기 계발서 잘못 읽은 헛소리 공격'은 어디 학원에서 배워오는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거의 같았다.


이렇게 어디 털어놔도 공감받기 어려웠던 후레자식 마인드 혹은 '태어난 것이 고통이요'라는 생각은 그런데 최근 반 출생주의라는 말과 함께 2030 비출산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법 이해받고 있다.

놀랍게도 불과 몇 년 사이 벌어진 일이다.


나는 비혼과 비출산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결혼과 출산의 고통을 겪고 나서야 완성된다고 믿지만(!), 어쨌든 굳이 이론의 완성까지 갈 필요도 없이 벌써부터 확고하게 제 삶의 길을 정한 사람들 상당수가 '굳이? 이렇게나 힘들고 대단할 것 없고 고생스러운 세상에 아이를 낳는다고?'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심지어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고 기후 변화가 심하고 살면서 좋은 일이라곤 한 줌이고 가난하고 아프고 슬프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2030은 둘째고, 이제 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초등학생들까지 나서서 저들끼리 낳아짐을 당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내가 낳아줬으니(삶을 줬으니) 너는 고마워해야 한다.

내가 또 자식을 낳아 이 꼴을 물려줄 만큼 사는 게(세상이)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낳아달라고 애원한 것도 아니고 부모가 나를 키우는 건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과연, 그냥 대충 봐도 부모 세대, 반 출산주의 2030, 낳아져 버린 초등학생들(?)의 생각은 양립하기 어렵다.

같은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아하기도 하고 양 끝에서 서로의 말만 하는 것처럼 심히 동떨어져있기까지 하다.


이제 낳은 것 자체가 죄라는데, 사는 게 재미없고 힘들다는데 키워준 공은 말해 무엇하리.

기껏해야 자기들 멋대로 낳은 것에 대한 속죄라고나 안 하면 다행이다.


결국 낳아준 은혜에 보답하라는 효도는 낳아준 원수가 되는 세상에선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한쪽에선 결혼하며 부모님께 집을 받는다고 난리고, 다른 쪽에선 서른 살이 넘어도 부모님과 같이 산다고들 하는데 그럼에도 낳아준 게 감사하진 않다니,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건 의무인데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건 선택일 뿐이라니, 이미 자식한테 돈 다 준 부모는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는 참, 환장할 노릇이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정말 우리나라는 아이를 낳아 키울 곳이 못 되는가?

그래서 이런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면 제멋대로 낳아버린 것에 불과하니 효도까지는 바랄 수 없다는 건가?

정말 통계적이고 현실적이며 제법 논리적인 문제들이 '낳아짐 당한 인간들의 세상'을 초래한 원인인가?

아니면, 컴퓨터 게임을 해서 여드름이 나고 배가 아프다는 어머니 말씀처럼, 이 모든 게 다 SNS 탓이란 말인가?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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