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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선 Aug 23. 2023

사랑하는 사람을 그린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자세히 하나하나 보고 그리다 보면 내가 보지 못했던 손가락 모양눈썹턱 선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고입술을 그리다 보면 그녀와 입 맞췄던 부드러운 맛이 생각나고그녀의 살 냄새가 코 밑을 스쳐 지나가고, '사랑해'라고 했던 말이 귀에 맴돌고꼭 안아줬던 따스함이 느껴진다. 

        

다음 주는 수정이와 만난 지 6주년이 되는 날이다.  6년의 연애기간동안 내가 지은 죄를 짬밥 삼아 삼키고 삼키다보니 수정이는 어느덧 '김 병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6년차 이등병이다. 김 병장님이 나에게 뭐라고 할 때는 앞으로도 뒤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잘 갈군다.


"오빠! 내가 술 마시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맨날 술 마시고 힘들다고 하지 말고 마시지 말라고!!"

"아.. 그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 나는 군 시절 이등병으로 돌아가 있다.

김 병장의 말에 말대꾸를 할 수가 없다. 뭐라고 변명해 봤자 더 혼나기 때문이다.

다 나의 업보라고 생각한다.   

   

6년간 참 많이도 힘들게 한 것 같다. 잘 다니는 회사 그만두고 세계일주를 떠난다고 해서 나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처음 3개월은 함께 여행을 했다. 3개월 중 첫 달은 프랑스 오지의 시골에서 친환경 농사를 지으러 갔는데 거기서 끔찍하게 싫어하는 벌레들과 지내게 했다. 나머지 두 달간 도 풍족한 여행이 아닌 캠핑과 싸구려 호스텔에서 지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한 마음이다.     


3개월이 지나고 터키 이스탄불 공항에서 헤어질 때 얼마나 서럽고 크게 울던지 공항을 순찰하던 경찰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해명하느냐 진땀을 뺐다.     


그렇게 수정이는 한국으로 가고 나는 1년간 더 여행을 다녔다. 군대를 가면 면회라도 올 수 있지 한국을 떠나 있는 나는 면회도 어려웠다. 


그 시간을 혼자서 지내야 했을 수정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런 시간들이 수정이를 '김 병장'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김 병장님을 이번 6주년 선물로 그려보고 싶었다.      


그림 그릴 사진을 찾기 위해 사진첩을 뒤져보았는데 그림은 뒷전으로 하고 추억 속에 들어가 버렸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나왔던 관람차에서 찍은 사진, 스위스의 푸른 들판에서 찍은 사진, 헬스장에서 운동하며 찍은 사진, 다양한 먹거리를 먹으며 찍은 사진 등 참 사진이 많았다. 


잘 나온 사진 하나를 골라 추억 속에서 나왔다. 그림이라고는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끄적인 게 전부인 나에게 인물화를 그리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림은 정성과 느낌이 중요해!' 

'내가 언제 이렇게까지 수정이를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인물화를 그리려면 아니 무언가를 그리려면 우선 대상을 하나하나 꼼꼼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릴 수 있다. 수정이의 얼굴, 눈, 코, 입, 웃을 때의 표정, 입은 옷의 주름 하나하나, 손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그렸다.


근데 그림이라는 게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 그림을 보여주는 순간 나는 지옥문을 열고 들어갈 거라는 걸 100% 확신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그림 꽤나 그린다는 씽씽에게 보여주었더니 이건 너무 심하다는 거다... 내가 봐도 너무 심했다.


씽씽은 차선책으로 캐릭터처럼 그려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우선 동네 만화방에서 캐릭터를 따라 그려 봤다. 캐릭터는 자세하게 그리지 않으니 꽤나 그릴만 했다.  

    

근데 이게 수정이를 그리려고 하면 전혀 그녀답지 않게 그려지는 것이다. 이것도 실패다. 그렇게 실패의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니 꾀가 생기기 시작했다.    

 

뒷모습을 그리자!! 그래서 여행 중에 수정이가 sns를 따라 하면서 찍은 멋진 풍경에 뒷모습만 보이고 손을 양 옆으로 쭉 뻗은 사진을 찾았다. 다행이다.      


막상 뒷모습 사진들을 찍어줄 때는 "그런 거 따라 하지 좀 마! 얼굴이 나와야 사진이지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찍어!" 라며 투덜댔던 나였는데 그 사진이 지금은 동아줄이 되었다. 뒷모습 사진을 따라 그리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균형만 잘 맞추면 되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을 생애 처음 완성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린다는 건 나의 오감을 깨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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