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은유, 책 먹기

몸 건강을 위해 과식을 피하듯, 과독을 피하자

by 썰킴

세계적인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은유가 된 독자>에서 독서에 대한 은유를 이렇게 든다. ‘독서’는 ‘인생’이다. ‘독서’는 ‘여행’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은유가 더 있다. 바로 ‘책 읽기’는 ‘책 먹기’라는 은유다.

어릴 때 TV에서 핫도그 빨리 먹기 대회를 본 적 있었다. 고바야시 다케루라는 일본인은 덩치 큰 서양인들을 제치고 핫도그 먹기 대회에서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동양의 작은 남자가 어떻게 핫도그를 저리도 빨리 먹으며, 덩치도 2배는 됨직한 서양인들보다 많이 먹을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경이로웠다. 그가 핫도그 먹는 장면을 보면 자신만의 노하우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빵을 여러 번 접어 압축하고, 물에 찍어 빵을 먹으며 자칫 건조해질 그의 입과 식도를 보호했다. 그리고 리듬 타듯 씹어 넘긴다.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내가 관찰한 단순한 외적인 움직임 말고도, 내부적으로도 고도의 전략을 세워서 연습했을 것이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다독가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읽으며 고바야시와 묘하게 오버 랩 된다. 수 만권의 책을 독파한 그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초인이라 생각했다. 하루에 한 권 소화하기도 버거운데, 짧은 시간에 수십 권씩 독파하는 그의 독서 기술. 그러면서도 책을 요약, 핵심만 추리는 능력은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정보의 바다에 빠져 하나의 정보체로서 정보의 신진대사를 계속하면서 정보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을 끊임없이 정보를 입력하고 출력하는 정보 신진대사체로 보는 것’이야말로 정보 시대에 필요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음식으로 이야기하면 쉼 없이 섭취하고 배설하는 것. 책으로 바꾸어 말하면 쉼 없이 읽고 무언가 써내는 것. 즉 정보를 섭취하고 자신의 머리를 투과시켜 재창조된 정보로 배설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무척이나 설득력 있었다. 쉼 없이 정보가 생성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정보를 끊임없이 흡수하고 토해내는 그런 ‘정보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니. 그러기 위해서는 속독법을 익혀야만 했다.

그의 사례를 참고하여 다년간 많은 책을 빨리 읽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 많은 책들을 읽고 글로 배설했다. 나는 많이 읽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책의 맛도 못 느끼고, 뭘 먹었는지조차 망각했다. 남은 건 읽은 책의 수와, 모호한 기억의 잔상들. 그리고 정신과 눈의 피로감. 이 것이 내 속독의 결과물이었다. 돌이켜 보면 다카시와 나는 글 소화기관 자체가 달랐다. 다카시는 출판업을 하는 부모님 슬하에서 평생을 책 옆에서 성장한 활자 인간이었고 나는 보통 인간이었다. 그는 하루에 수십 권을 소화할 여력이 있었다. 나는 노력해도 몇 권이 고작이었다. 이런 속독이 지치기 시작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나는 적게 읽고 많이 느끼는 인간이었다. 속도에 집착할수록 많이 읽지만, 글에서 받는 울림은 작아졌다. 그걸 깨닫는데 몇 년 걸렸다.

다시 글을 꼭꼭 씹어 먹기 시작했다. 쌓아놓고 허겁지겁 먹는 버릇을 버렸다. 책을 대식하여 과식하기보단, 맛을 음미하는 미식의 길로 들어서기로 했다. 느리게 보기가 지겹다 생각될 쯤엔 평생을 성경, 코란 한 권의 책으로도 충만한 내면을 가꾸는 일신교의 신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아마 한 권의 책으로도 맛의 진수를 맛보았을 터이다.

모두가 각자 삶의 리듬이 있을 것이다. 독서도 마찬가지. 고수라 해서 그의 방법을 무조건 맹종하는 건 옳지 않다. 각자 자신만의 리듬에 따라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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