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실리테이터가 경계해야 할 섣부른 판단
"마음대로 안 풀리는 회사 일들, 자기 마음대로 변덕 부리는 상사, 인정 따위는 바라볼 수 없는 평가... 이 곳은 희망이 없어. 내 생각이 맞았어.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낫다!"
"이 정도 논의했으면 이제 결정합시다. 회의 길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저 사람이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인가요? 원래 그렇지. 뭐"
한두 번쯤 떠올렸거나 주변에서 볼 수 있을만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떠오르는 광고 카피 하나.
팩트입니까?
우리는 늘 자신은 합리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긴다.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고 옳다고 믿는 생각 역시 자신의 인식(perspective)에 기초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답을 찾아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과 욕구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을 옳은 것이라 그대로 믿어버리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에어리 쿠르굴란스키는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인지적 종결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종결욕구란 어떤 질문 혹은 문제에 대해 모호함을 피하고 어떠한 답이든 확실한 하나의 답을 빨리 도출하고자 하는 욕구이다.(Kruglanski,1989)
빠르다. 그러나 빠른만큼 위험하다!
종결욕구 자체에 대한 평가를 하기가 쉽지 않지만, 조직에서 업무를 처리하거나 함께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회의 현장에서 이 종결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하게 되므로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빠르게 내리는 결정이 정확한 경우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논쟁을 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속도가 빠른 의사결정은 직관적에 따라 결정이 이루어지거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깊이 탐색하기 어려우므로 성급한 결정을 내리거나 이로 인해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 일이 많아질 수 있다. 성급한 결정을 내리고도 결정된 사안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생겨난다. 심지어 결정을 내리고 그에 맞아떨어지는 근거를 찾아 방어를 하기도 한다.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하거나 모 아니면 도를 선택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 지기도 한다. 불확실한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고 이로 인해 스트레스와 불안감,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인지적 종결욕구가 낮은 경우에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최대한 많은 자료를 검토하기를 원하고,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신중하고 정확한 결정이 이루어지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자료 수집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의사를 결정하여 표현하는 것을 지연하는 경향이 있어 중요한 결정시기를 놓치게 되는 가능성이 있다(박순진,이지연,이성원,2009).
기본적으로 많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회의가 불필요하게 길다고 인식하고 있다.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빠른 결정, 아니 성급한 결정을 내리는 문화가 조직에 스며들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회의를 진행하는 리더나 퍼실리테이터라면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경계해야 한다.
종결욕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를 개인적 요소와 상황적 요소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인적 요소
쿠르굴란스키는 인지적 종결욕구는 질서와 예측가능성에 대한 선호, 결단성, 애매모호함에 대한 참을성, 개방성의 5가지의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삶이 질서 정연하고 구조화되기를 바라는 질서에 대한 선호
일관되고 변하지 않는 지식을 선호하는 예측가능성에 대한 선호
신속하고 종결에 도달하고자 하는 판단에 대한 명확성과 결단성
모호한 상황을 싫어하는 모호함에 대한 참을성
자신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증거나 의견에 대한 개방성
상황적 요소
종결욕구를 강화시키는 대표적인 상황적 요소는 시간의 압박이다. 데드라인이 명확하고 여유롭지 않으면 빠른 결정에 대한 상황적 요구는 거세질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하여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어려워진다. 또한 이는 생산성과도 직결되어 있다. 그 외에도 과제의 특성(확산형, 수렴형, 문제해결형 등)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구성원은 빠른 결정과 자신감 있는 의견 제시자에게 동조한다.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감 있고 단호한 태도로 의견을 제시하면, 게다가 논리적인 이유인 듯 한 근거가 함께 등장하면 그 의견에 동조하기 쉽다. 특히 그 사람이 리더인 경우 그런 상황은 급속히 확산될 수 있다. 게다가 각자 잠재되어 있는 종결욕구가 커지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이 회의의 구원투수인 듯 여겨지고 카리스마까지 느끼게 된다.
편견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빠른 결정을 하고자 하는 종결욕구는 판단 과정에 우리의 편견을 끌어들이게 된다. 극단적으로는 조급해지고 충동성이 강해지며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견해와 의견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져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본능과도 같은 종결욕구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평소 신뢰하던 것에는 과도한 신뢰를 주어 스스로 확실함을 가지려 하고, 평소 불신하거나 부정적인 대상이나 사람에게는 더 강한 불신을 갖고자 한다.
문제 자체를 단순화한다.
단순한 문제는 해결도 빠르게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하는 문제가 과연 쉽고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요소들을 단순화하고 평이하게 해석하면 해결책은 간단히 나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 정의부터 현실적이지 않아 엉뚱하게 분석하거나 빗나간 예측으로 현명하지 못한 대안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회의 결과물의 품질이 낮아진다.
심층적이고 다양한 논의 자체를 거부하거나 반감을 갖게 되는 경우, 빠른 마무리에 집중하게 되어 본질을 살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종결욕구에 쫓기는 상황에서는 충분한 정보의 공유와 검토를 바탕으로 한 지혜로운 결정(Informed Decision)을 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즉, 빠른 결정이 어리석은 결정이 될 수 있다.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즐기는 힘이 필요하다!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힘>의 저자 하하키기 호세이는 종결욕구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극적 수용력(Negative Capability)'를 제시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답을 내리기 않고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 어설프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가지고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탐색하는 모호함의 상태를 견뎌내는 힘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강조해온 빨리 답을 찾아내 상황을 종결짓는 능력인 적극적 수용력(Positive Capability)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리더와 퍼실리테이터에게도 이 소극적 수용력은 필요하다. 소극적 수용력은 의연함과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회의의 목적은 빠른 결정이 아니라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임을 인식하자!
회의에 참여하는 구성원과 정확한 회의의 목적 및 결과물을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간의 효율성은 매우 중요하다. 빠른 결정과 좋은 결정이 무엇인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 좋은 결정을 위해 필요한 과정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구성원이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절차를 준비한다.
회의는 그 준비가 성패의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절한 시간을 산정하고 그에 필요한 절차를 설계하는 것이 회의 주재자 및 퍼실리테이터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이는 퍼실리테이터의 진정성이자 전문성이 압축적으로 녹아나는 부분이다.
적절한 도구와 시스템을 활용하라!
구조적으로 반대의견이나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도구를 활용할 수 있다. 픽사에서는 새로운 작품을 기획하는 회의를 할 때 실패 가능성과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문화를 만들고, 미국 CIA에서는 군 작전을 수행할 때 반드시 반대 의견을 제시해야 하는 레드팀(Red Team)을 운영하는 것도 복잡한 상황과 반대 의견에 노출시키고 화두를 던지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사고를 확장하는 다양한 퍼실리테이션 도구와 심층 사고를 돕는 탐색의 질문들은 퍼실리테이터에게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Fast is Slow. Slow is Fast.
[참고자료]
하하키기 호세이 (2018). 황세정 역.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힘>. 끌레마.
박순진,이지연,이성원 (2009). <개인의 인지적 종결욕구와 부정적 기분조절 기대치가 초등학교 교사 소진에 미치는 영향>.한국 교육 논단.8(3), 1-23.
Kruglanski,A.W.(1989). <The psychology of being "right": The problem of accuracy in social perception and cognition>. Psychological Bulletin,106(3),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