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와 ETF...새로운 '방어선'
올해 상반기 이후 한국 증시는 반도체와 AI 기대를 앞세워 급등했다.
코스피 4000선을 위협하는 구간까지 올라가는 동안 외국인은 거대한 매수 주체였다.
5월부터 10월까지 누적 수십조 원의 순매수 자금이 유입되면서 지수의 각도는 비정상적으로 가팔라졌다.
11월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외국인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다시 수십조 원 규모를 순매도하며 흐름을 완전히 뒤집었다. 팬데믹 초기 패닉 장세에서조차 보기 어려웠던 속도와 규모였다.
이 움직임의 배경에는 세 가지 축이 겹쳐져 있다.
첫 번째 축은 환율이다.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넘긴 뒤 1470원 안팎까지 치솟았다. 원화 자산을 들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이 구간은 이익과 위험이 동시에 커지는 영역이다. 지금까지의 주가 상승과 환율 움직임을 합치면 상당한 평가이익이 쌓여 있다. 하지만 원화가 더 약해지거나, 한국 증시가 조정 구간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이익의 일부가 환차손으로 빠르게 전환될 가능성이 커진다. 외국인의 대량 매도는 이 경계선에서 나온 선택에 가깝다. 이미 확보해 둔 주가·환율 이익을 일정 부분 확정하고 향후 환율과 시장 변동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손실 가능성을 잘라내는 행동이다. 겉으로 보이는 단어는 ‘환차익 실현’이지만, 내막은 ‘환차손 리스크 차단’까지 함께 포함한 포지션 정리다.
두 번째 축은 밸류에이션이다. AI·반도체 랠리 이후 한국 대형 기술주의 주가 수준은 이미 글로벌 동종 업종과 비교해도 빠듯한 밸류에이션 구간에 들어섰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 실적이 뒤따라 확인되기 전까지는 더 높은 가격을 감수하며 보유를 이어가기보다는, 일단 차익을 실현하고 관망하는 쪽이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특히 파생상품과 프로그램 매매를 병행하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수급이 한 번 꺾이기 시작하면 단순한 ‘조정’이 짧은 시간 안에 대규모 포지션 정리로 번지기 쉽다.
세 번째 축은 글로벌 매크로 환경이다. 미국의 금리 인하 시점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달러 강세와 세계 경기 둔화 우려가 겹쳐 있다. 이럴 때 글로벌 자금은 위험자산과 비핵심 시장에서부터 비중을 줄이며 현금을 늘리거나, 더 전략적인 지역과 섹터로 포트폴리오를 이동한다. 한국 증시에서 벌어진 외국인의 매도 행렬은, 이런 글로벌 조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외국인의 대규모 순매도는 단순한 '환차익 욕심'으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고환율 구간에서의 환차익과 환차손 리스크, 반도체·기술주의 밸류에이션 부담, 미국 금리와 글로벌 경기 변수까지 동시에 고려한, 이익 실현과 리스크 축소 전략이 겹쳐진 결과에 가깝다.
정권이 ‘코스피 5000 시대’를 공언할 때마다, 정치권의 상상 속에는 항상 비슷한 그림이 따라붙는다.
위기 때마다 시장을 지켜온 연기금과 공적 자금이, 필요하다면 다시 한 번 방패를 들고 나올 것이라는 기대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공식 숫자를 들여다보면 이런 상상이 현실과 이미 어긋나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비중은 올해 들어 빠르게 상승했다. 기금운용위원회가 정한 목표 비중 근처까지 다가섰고, 일부 구간에서는 이를 웃돌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금 운용 규율을 감안하면 이 지점 이후에는 추가 매수로 비중을 더 키우는 결정이 쉽지 않다.
연기금은 본질적으로 ‘시장 플레이어’이면서 동시에 ‘공적 자금 관리자’다. 주가가 빠질 때 과감하게 비중을 늘리면 당장은 시장에 힘이 되지만 정치 환경이 흔들리거나 수익률이 부족해지는 순간 “왜 연금을 주식에 쏟아부었느냐”는 역풍이 돌아오게 되어 있다. 현재의 비중 구조는 연기금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여지를 크게 줄여놓았다. 코스피가 조정을 받을 때 과거처럼 “연기금이 바닥에서 받쳐준다”라는 장면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외국인의 대량 매도 속에서도 코스피가 순식간에 붕괴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쪽에서 누군가 그 물량을 받아냈기 때문이다. 수급 통계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그 얼굴이 서서히 드러난다.
하루에 수조 원 규모의 외국인 매도가 쏟아진 날, 국민연금과 기타 연기금의 순매매는 제한적인 수준에 머무른 반면, 금융투자와 개인 투자자의 순매수 규모는 두드러지게 커졌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금융투자 항목이다. 증권사·운용사 등으로 묶이는 이 계정은 올해 내내 코스피를 꾸준히 순매수해 온 세력으로 집계된다. 누적 수조 원에서 많게는 수십조 원에 이르는 매수 잔고가 쌓였고, 11월과 같은 급격한 조정 구간에서도 지수 하단을 받치는 역할을 했다. 다만 금융투자를 곧바로 ‘기관의 확신’으로 읽는 것은 절반짜리 해석에 그친다.
이 계정의 상당 부분은 ETF를 통해 들어온 자금이다. 개인과 국내 기관이 증권사를 통해 지수·섹터 ETF를 매수하면, 실제 돈의 출처가 개인이든 회사든 상관없이, 통계상으로는 금융투자 계정의 매수로 잡힌다.
결국 외국인이 던진 물량의 상당 부분은 국내 자금이 ETF라는 통로를 통해 받아내는 구조로 시장에 흡수되고 있다. 차트에서는 ‘금융투자의 대규모 순매수’라는 굵은 선 하나로 표시되지만 그 선의 안쪽에는 리테일과 로컬 기관, 로보어드바이저와 자문형 랩이 뒤섞여 있다.
코스피를 지금 실제로 떠받치고 있는 힘은 연기금이 아니라 금융투자 명의로 찍힌 ETF 자금과 개별 종목을 직접 매수하는 개인 투자자들의 결합이다.
이재명 정부와 여당은 ‘코스피 5000 시대’를 이야기하며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상법 개정, 지배구조 개선, 자사주 소각과 배당 확대 같은 구조 개혁을 내세운다. 표면적으로는 장기적인 밸류에이션 정상화를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수급의 현실은 다르다. 외국인은 고환율과 밸류에이션 부담, 글로벌 불확실성이 겹친 자리에서 대규모 포지션 축소에 들어갔다.연기금은 이미 국내 주식 비중 상단 근처에서 정치적·제도적 리스크를 감수하며 추가 매수를 확대하기 힘든 위치에 놓였다.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은 국내 자금이 ETF와 직접 매수를 통해 만들어낸 '새로운 방어선'이다.
증권사 계정으로 통계에 찍히는 금융투자의 순매수, 하락장에서 틈을 노려 들어오는 개인의 매수 이 둘이 합쳐져 외국인의 매도 공세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다.
정권이 내세운 ‘코스피 5000’이라는 슬로건이 실제 힘을 얻으려면 수급의 이 구조를 바꾸거나 최소한 안정시켜야 한다.
연기금과 외국인 자금이 신뢰를 가지고 다시 들어올 수 있는 제도 환경을 만드는 일, 거버넌스·주주환원·세제·규제 체계를 시장이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쳐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 과정이 지연되거나 실패하면, 지수는 당분간 국내 ETF와 개인의 체력만으로 버텨야 한다.
외국인의 발걸음이 가벼워진 자리에서 연기금이 더 이상 앞장서 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방어선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에 따라 ‘코스피 5000’이라는 말이 실체를 갖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정치적 수사로 남을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자유와혁신 최고위원 김진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