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직장인(Feat. K장녀) 엄마는 예쁜 장미이다.

by 일상을 여행처럼
엄마는 예쁜 장미이다.

항상 곁에 두고 싶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가끔 가시에 찔릴 때가 있다. 아름다운 거리가 필요한 존재이다. 엄마와 딸은.



우리 엄마는 예쁜 장미를 닮았다.

나는 장미꽃을 제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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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는 친했었다.


10대, 20대 중반까지 나는 사춘기 없이, 엄마 말을 잘 듣는 순한 딸이었다.

아기 때에도 쭉쭉이만 물려주면 잘 자고, 혼자서도 잘 놀았다고 할 정도로 순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때도 공부 만하고, 엄마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이었다.

엄마는 억척스럽기도 하고, 약간 다혈질에 (B형), 즉흥적이면서도, 여리고, 야망 있고, 애정이 많은 그런 여성이다.


엄마가 나의 하늘이었고, 어떤 것을 결정할 때도 엄마의 영향이 컸다.

연애도 엄마와 상의하고, 많은 것들을 엄마에게 물어보고 결정했다.

엄마는 항상 답을 알고 있었고, 그 답대로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을 안정 시키기도 하고, 불안하게 하기도 하였다.


아니, 엄마는 불안하게 만든 뒤, 엄마의 말을 잘 따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내가 더욱더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받는 모범생으로 자랄 수 있었다.

날 통제했고, 엄마의 판단으로 옷과 친구들, 성적표 등등이 좌지우지 되었다.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더 이상 공부가 하기 싫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그리고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냥 책상에 앉아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많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나를 찾아가는 하나둘씩 연습 하였다.


그러면서 엄마와도 부딪히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동아리를 하면서 막차를 타고 집에 오기 일쑤였고,

엄마는 과 엠티에 간다하면 신발 사진들을 찍어오라는 말씀으로 나를 통제하였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말에 저항할 수도 있었고, 엄마가 나를 밧줄로 묶어 둔 것도 아닌데,

내가 엄마에게 길들여서 밖에 나가서 혼자 노는 것도 불안해 했고, 남자친구와도 편하게 놀지 못했었다.

쇼핑할 때도 엄마가 나에게 입히고 싶은 옷들을 구입했고, 그 덕분에 스스로 쇼핑을 하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옷을 잘 몰랐다.) 그래서 쇼핑이 즐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나에게 '라벨지'를 붙였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나는 30대 초반 때까지 엄마에게 나의 생활에 대한 설명과, 나의 삶에서 엄마를 분리하는 연습을 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되었다 고는 할 수 없다.


맏이 라는 이유로, 엄마가 서운해 하지 않고, 편안했으면 좋겠고,가족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니까, 내가 조금 희생해서 라도 가족끼리 뭉치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신 때마다 케잌을 준비하고 이벤트를 준비하며 나는 열심히 인정받으려고 애써왔다. 하지만 엄마의 반응은 내 생각보다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나와 기질이 다르셔서 표현이 툭툭 하시고, 냉정한 편이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기질적으로 감성적인 스타일이 아니므로,무엇에 놀라고 감동하고 행복 해하고 만족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는데, 나는 그런 성향이므로, 나의 어떤 노력에 감동하고 행복해야 된다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마치 엄마가 나에게 '기대' 했듯이 말이다.



20대 후반 그리고 30대 초반. 한바탕 전쟁을 겪고 나서 우리는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엄마와 통화하는 것도 힘들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걱정과 잔소리 들이 내 안에 가득 차서 끓어 넘칠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는 비움과 아름다운 거리가 필요했다. 엄마와 분리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을 하면서도 큰 분리를 하였다. 엄마가 만족해 하는 나의 이성은 한 명도 없었는데,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아쉽고, 뭐가 아쉽고 하시는 말씀을 계속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나는 결혼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도 무수한 다툼과 갈등과 설득의 시간들이 있었지만,

결국 결혼을 했다.

이 불안함을 무디게 만들어주고, 나의 우울한 정신을 정화시켜주고 있는 감사한 남편과 함께. 지금 행복하다.


아직 엄마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습관적으로 '~하지 그랬어.', '그러면 성공 못해' 등 부정적인 말그릇이 있으셨고, 이사를 할때도, 둘의 일을 결정 할때도 많은 관여를 하고 싶어하셨다. 딸의 성공적인 결혼을 항상 바라셨는데, 엄마의 기대에는 충족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주 퇴근하여 즐겁게 통화하려고 도전했지만, 결국 엄마의 쓴소리에 지하철에서 눈물이 나고 분함이 올라왔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엄마와 더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해버리곤 했다. 퇴근 길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울면서 엄마에게 호소했다. 엄마는 아직 내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엄마의 말이 상처가 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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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덕분에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교육분야와 코칭을 알게 되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엄마를 많이 이해해나가고 있다.

엄마도 엄한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맏이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악 착같이 공부하고 일했고, 야무진 엄마는 성과도 잘 내었다.

그러다 아빠를 만났지만, 서로 기질이 잘 맞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다 그랬다 지만, 이것 또한 서로의 운명이었다. 부모님의 다투는 모습은 나의 불안을 키웠고, 각자의 스트레스는 자식에게도 전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당시 그들의 나이가 되었다. 그들도 처음이었고, 본인들의 상처와 힘듦을 치유할 새도 없이,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꾸려야 했다. 매우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잘 지낼 만큼의 경제 환경이었다.


경제적인 것과 별개로 마음의 가난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 모든 과정 덕분에 심리학을 알게 되었고,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지금까지 나는 성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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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사랑하는 것 같다.


나의 분신 같았던 엄마. 이제는 우리 서로 독립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엄마가 나의 학업에도 관심을 많이 주시고, 내가 아플 때마다 밤새 간호해주시고, 예쁜 옷을 사주시고, 예쁘게 머리 묶어주시고, 함께 운동회에 참여하고, 무수한 박물관에 데려가 주신 일들을 알고 있다. 애정과 사랑으로, 나 잘 살라고 당근과 채찍을 주신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지금 시기는 또 우리와 더 맞는 사람들과 나눌 타이밍 인 것 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되어보지 않았기에, 나중에 엄마가 되어 이 글을 본다면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아직 엄마와 함께하기도, 멀어지기도 힘든 존재이다.

하지만

엄마를 사랑한다.

감사하다.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의 존재로 행복하기를 바란다.

분리하는 지금의 시간들이 모여 나중에 우리를 더 자유롭게, 미소 짓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지금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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