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도착해 미디어 석에 앉는 순간, 이상호의 운명이 바뀌었다. 0.01초 차 탈락. 이상호의 스노보드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도 않은 기자들도 허탈했는데, 4년을 설원 위에서 구른 이상호의 마음은 짐작할 수 없었다. 평창에선 0.01초 차로 결승에 나섰는데 베이징에선 0.01초 차가 뒤집어져서 돌아왔다. "뭐야, 뭐야"의 처음은 올림픽 취재 10일 만에 겨울 스포츠란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어서였고, 마지막 '뭐야!"는 그만큼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경기 뒤 만난 이상호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0.01초라도 진 건 진 것일 뿐이죠
이상호가 건넨 첫마디였다. 한숨이나 후회는 없었다. 담담했다. 사실 스노보드에선 이상호뿐만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언제나 0.01초 차이로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고, 얼마나 긴 시간을 쏟았는지에 따라 결과도 간절한 만큼 나오면 좋으련 만, 세상 일이 그렇게 풀리는 일은 드물다. 스노보드는 더 그렇다. 28개의 기문 사이를 파고들면서 수많은 우연이 생겨나고, 작디작은 눈의 입자도 기록을 조금이나마 삭감해 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허무를 견디는 방법으로 이상호는 자신을 믿은 것 같다.
이상호는 과정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세계 1위 이상호는 올림픽 무대에서 운이 좋지 않았을 뿐, 스스로를 끝까지 믿는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내려고 한다.
평창 은메달 이후 응원만큼 부담도 늘어난 것 같아요
이상호는 우리 설상에 첫 메달, 은메달을 따냈다. 고랭지 배추밭에서 썰매를 타다 스노보드 선수의 꿈을 품은 이야기가 더해진 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이상호를 향한 응원으로 이어졌는데, 부담 없이 해보자는 마음으로 탄 4년 전보다 응원을 안고 탄 보드가 조금은 더 무거웠나 보다. 이상호는 이런 압박을 견뎌내기 위해 올 시즌 일곱 차례 월드컵에 나가 메달만 네 개를 따냈다. 올 시즌만 보면 이상호보다 스노보드를 잘 타는 사람은 없다. 잘 이겨내는 듯 보였지만 올림픽은 달랐다. 월드컵엔 사람들의 주목이 줄었고, 올림픽엔 갑작스레 관심이 늘어났다. 이 차이를 이겨내는 건 이상호의 몫이 아니었다. 눈과 바람과 햇빛이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사실 시즌 중반이에요. 다시 준비해야죠
보는 이도 안타까운 결과를 받아 들고, 이런 말을 하기가 쉬울까. 알파인 월드컵 통산 73승을 거둬 '스키 여왕'이라 불리는 미케일라 시프린(미국)은 여자 대회전 경기에서 10초 만에 넘어지고 "우는 건 낭비다"는 말을 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의 심장이 우리보다 특별히 더 단단하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들여다보고 싶은 건 그들의 마음가짐이다. 실수냐, 실패냐를 가르는 데 애쓰지 않는다. 다음의 스노보드에, 다음의 스키를 생각하면서 무엇이 가장 최선일까 생각해본다면, 지금까지 노력해온 나를 믿는 것. 그리고 오늘의 실수를 내일의 성취로 바꿔내는 건 이 믿음 안에서 이뤄지는 게 아닐까. 묵묵히 설원 위를 내려오는 이상호를 보며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