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사회를 살아남은 비(非)게이머의 변명
동네에서 함께 자랐던 친구들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신년회를 겸해 대부도 1박 2일 일정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무려 15명의 친구들이 시간을 맞추었다. 결혼한 친구들도 있고, 멀리서 오는 친구도 있어서 오는 시간도 제각각, 가는 시간도 제각각이었지만, 첫 날 저녁은 모두 함께 모여 먹었다. 15명의 어른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 수 있도록 넓은 복층에 지하에는 6대의 고사양 PC가 있는 펜션을 빌렸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게임에 진심이다. 이번 여행도 주요 컨텐츠는 놀고 먹기다. 날 밝을 때 모여 족구로 몸을 풀고, 허기진 배를 고기와 술로 채우고, 비치된 PC 6대에 개인 지참한 노트북 2대를 추가해서 4 대 4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열고, 또 각종 게임으로 벌칙[상 차리기/정리하기 등] 내기를 수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승패와 상관없이 오랜만에 걱정없이 웃고 떠들며 시간가는지 모르게 놀았다.
나는 몸으로 하는 게임이나 족구에는 참여했지만, PC로 하는 스타크래프트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게임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스타크래프트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게임인 배틀그라운드, 오버워치, 롤 등의 배틀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도 시험이 끝나면 친구들과 PC방을 가지 않고, 노래방을 갈 때에만 합류했다. 때때로 친구들이 노래방을 가기 전에 PC방을 먼저 가자고 하면 나는 PC방에서 혼자 웹툰을 보면서(당시에는 웹툰을 PC로밖에 볼 수 없었다) 친구들의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친구들과 PC게임을 즐기지 않았다고 해서 게임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요즘은 잘 못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유명한 싱글 게임들을 플레이했다. 즐겨온 게임들은 보통 영화나 책을 보듯이 스토리를 따라가며 플레이하는 게임이었다. 내가 하지않는 게임은 타인과의 승부를 통해 승패를 가르는 온라인 게임 종류이다. 나는 태생이 평화주의자로 태어난 바람에 승패를 가르는 게임은 성미에 영 맞지가 않았다. 게임을 하다보면 부모님의 안부도 자꾸 묻게 되고, 친구들끼리도 이기면 내 탓 지면 니 탓이 되는 것이 마냥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이런 배틀 게임을 하지 않는 솔직한 이유는 아니다. 왜냐하면 축구를 할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지만 축구는 속시원하고 기분좋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갈등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지만, 마음씨가 착해서 평화주의자였던인 것은 아니다. 사실 어릴 적 내 머리 속은 피(?)의 전쟁터였다. 나에게 게임은 지면 목숨을 잃는 전쟁터에서처럼 지는게 너무 싫었을 뿐이다. 지독한 승부욕으로 항상 열불이 나고 속이 들끓었지만 겉으로는 하하호호 사람좋은 얼굴로 포장하며 지더라도 쿨한척하는 가식적인 아이였다.
당연히 나도 스타크래프트를 해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PC방을 가서 처음으로 스타크래프트를 해봤다. 나는 스타크래프트는 생판 처음이었고, 친구들은 서로 즐기면서 할 줄 아는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친구들도 나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친구들은 내가 처음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나의 플레이는 당연히 처참했고 친구들에게 조롱당하며 치욕적으로 패배했다. 친한 사이이기도 했지만 친구들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손을 부들부들할 정도로 약 올리며 플레이를 했다. 그 순간 나는 지는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 날 친구들의 심보가 유난히 고약했기에 그 패배는 더욱 충격이었다. 처음인데 좀 봐주지.. 나쁜 자식들.. 초등학교 4학년 그 치욕스러운 패배의 날 이후 나는 다시는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를 하지 않았다.
강한 승부욕[지기 싫어하는 것]과 강한 메타인지[내 주제를 아는 것]가 결합하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얼마나 시간을 투자해야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올라갈 지 견적을 딱 낼 수 있기 때문에, 못하는 건(짧은 시간 실력을 올리기 어려운 것을 포함한다) 최대한 피하고 잘하는 것에만 집중 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그 패배의 날 이후로 며칠간 친구들 몰래 집에서 혼자 스타크래프트 연습을 해보았었다. 하지만 알려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컴퓨터를 상대로 연습하는 것으로는 이 치욕을 갚을 가능성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었다면 아마 절치부심하여 유튜브로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그 치욕과 패배의 두려움을 일찌감치 극복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의 기술력과 내 상황으로는 그럴수가 없었다.
이것이 친구들이 그렇게 PC방에서 추억(?)을 쌓을 때, 혼자서 웹툰과 만화책이나 보게된 진짜 이유이다. 이제와서는 내가 원래 승부욕이 강해서 그렇게나 분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이후로 지는게 극도로 싫어지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가정이든 학교에서든 뭐든 등수를 매기고 승패를 가르고 이기는 법을 가르쳐 온 한국 사회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질 것 같은 승부나 잘 못하는 분야에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고, 내가 잘하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그렇게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잘 지는 방법을 모르고 크느라 친구들과 스타 한판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최근 한 친구와 식사를 하며 자녀 교육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결혼 후 슬슬 부모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나는 대치동에서 일한 이후로 종종 친구들에게 자녀 공부는 어떻게 시킬 것인지를 물어보곤 하는데, 이 친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아이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응원할꺼야.”
나는 반문했다.
“오, 그럼 공부는 안해도 돼?”
그 친구는 자신이 깨어있는 부모가 된 듯이 대답했다.
“하고 싶은 걸 해야 열심히 하고 성공하지. 무조건 공부만 시킨다고 성공하는 시기는 아니니까. 대신 좋아하는 걸 하기로 했으면 진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지 지켜볼꺼야.”
그때 내 친구의 대답이 왜 그리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잘하지 않으면, 이기지 않으면, 성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듯한 그 말이 거슬렸고, 경쟁적인 우리 세대의 문화가 다음 세대로 그냥 그렇게 넘어가게 될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걸 하는데 꼭 온 힘을 다 해야해? 성공한 삶이어야 해? 공부가 싫고 다른게 좋다면 그걸 죽도록 하는걸로 좋아한다는 걸 증명해야 해? 공부 안할 거면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그러게 ... 너 말도 맞긴 한데…“
나는 적당히 살아도 행복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를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 친구의 교육론에 반대를 했지만, 사실 나는 내 친구를 깊이 이해한다. 나와 친구가 지나온 환경은 경쟁적으로 사는 것이 기본값이다. 공부든 다른 분야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세대이므로, 우리의 자식 세대들이 우리만큼 열심히 살지 않는다면 실망감도 더욱 클 것이다. 과거의 내 열등감과 승부욕이 어느 정도는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는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경쟁적인 한국 사회가 우리의 삶을 이만큼 발전시켜 왔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길은 아니었다. 원하는 목표를 이룰 때까지 괴로울 수 밖에 없는 길이다. 나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우리처럼 결과에 매몰되면 더 이상 과정을 즐기지 못할까봐 걱정이 들었다. 과거의 나처럼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진즉 포기해버리고 말까봐 말이다. 물론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견은 아직은 현실성이 부족하고 너무 낭만적이기만 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일단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지는 것이 분하지 않다. 이기면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지고 나서 시원하게 웃어 넘기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이제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친구들이 날 끼워주지 않는다. 옆에서 노래나 부르라는데, 참 슬픈 일이다… 이제는 내가 끼고 싶어도 너무 못해서 친구들도 나도 재미를 못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런 짓궂은 농담도 이제는 깔깔 웃으며 넘길 수 있다.
게임에 이기든 지든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을 수도 있고, 밥을 맛있게 먹을 수도 있고, 벌칙으로 청소를 해야하더라도 콧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에 맞는 인용일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이 정말 죽고 죽이는 오징어 게임만 아니라면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하하!
** 참고로 이번 여행에서 나는 운좋게도 다른 게임들을 통한 벌칙에는 (스타크래프트는 하지 못했으므로 제외) 단 한번도 걸리지 않았다. 역시 그래서 더욱 즐거웠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