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 만병통치약

by 박주호

유난히 길고 더웠던 여름의 무더위가 드디어 조금씩 사그라드는 듯한 분위기이다. 사무실 안에서 보는 하늘은 해가 쨍-하니 뜨겁게 비추었다가 어느새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린다. 지루할 틈이 없는 날씨 덕택에 사무실에서의 하루는 더욱 길게 느껴지는 듯하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내 뒤통수를 얼얼하게 내려치는 혈당 때문에 오후 시간이면 책상의 높이를 조절한 후 서서 업무를 보곤 한다. 거기에 신발을 지압 슬리퍼로 바꿔 신고 슬리퍼의 돌기를 양 발로 번갈아 힘주어 밟고 있으면 잠시나마 집중력이 향상된다. 그런데 오늘은 서 있어도 온 몸이 나른하고 특히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땡떙하게 아려와서 서 있기를 포기하고 그만 앉아버렸다. 아무래도 지난 주말 여름 끝자락에 열린 10km 레이스를 뛰고 온 탓이겠지.


친구와 함께 대회를 처음 신청할 당시만 해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 봄바람에 떠밀려 호기롭게 하프 마라톤을 신청했었지만, 우리의 자신감은 여름에 진입하면서 뜨끈한 온도와 눅진한 습도에 녹아내렸다. 그나마 온도가 낮아진 늦은 밤에 뛰어도 10분만 뛰면 땀 범벅에 심박수는 170을 훌쩍 넘었다. 일에 치여 낮 시간 동안 방전되어버린 몸과 마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우리는 며칠 뛰어보다가 결국 하프 마라톤 훈련은 포기하고 가볍게(?) 10km 코스만 뛰어보자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10km 정도라면 주말에 한강변을 따라 가볍게 뛰기도 했었던 거리라서 별다른 훈련없이 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우린 틀렸었다. 5km 지나면서부터는 100미터마다 그만 포기해버리고 싶었다. 힘들어서 죽을 뻔 했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잘 뛰었는데 어떻게 된거지? 나는 그 사이에 왜 이렇게나 약해져 버린걸까? 오만 생각을 다하며 꾸역꾸역 완주를 하고 나니 기록은 62분 38초. 뛰면서 예상했던 것보다 기록은 잘 나왔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싶어 핑계거리를 찾기 위한 복기를 해보았다.


첫 번째 핑계. 온도와 습도의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 러닝을 할 때 컨디션을 가장 좋게 유지할 수 있는 적합한 온도는 10도 정도 알려져 있다. 특히나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의 러닝은 낮은 강도에서도 몸이 항정상태*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심박수가 올라가며 몸에 부담이 된다. 대회 당일 출발 시간 즈음에는 비가 꽤 많이 쏟아졌고, 3km 쯤부터는 비가 그치고 해가 뜨기 시작했다. 핑계대기 좋은 고온 다습한 환경이 적절하게 마련된 것이다.


두 번째 핑계. 좁은 코스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의 경험이 부족했다. 대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큰 대회같은 경우 차도도 폐쇄하고 넓은 도로에서 진행하지만, 작은 대회이다 보니 한강 산책로의 자전거 도로만 폐쇄한 코스였다. 문제는 초반에는 모두가 한번에 출발을 하다보니 도로 너비가 좁은데 사람이 너무 빽빽했다. 거기에 대회 초반에 내렸던 비 때문에 옷과 신발이 다 젖어서 몸과 발도 무거웠고, 설상가상으로 10m마다 물웅덩이 함정이 있었다. 초반에 너무 답답했던 우리는 사람들과 물웅덩이들을 조금씩 추월하면서 달렸고, 그 속도는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무리한 페이스였다. 게다가 앞으로 달리는 게 아니라 지그재그로 왔다갔다 달리다보니 비효율적이기도 했다. 솔직히 좌우로 왔다갔다 한 거리를 합치면 0.5km는 넘었을 것이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이유를 붙여가며 열심히 변호를 해보지만 결국에는 평소 연습이 부족했고, 그래서 실력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나 힘들었다는 것을 안다. 덥고 습하다는 것을 핑계로 몇 주동안을 주 2-3회 5km 정도만 아주 낮은 속도로 달렸다. 그 속도에 몸이 적응해버려서 약해진 것이다. 또한, 허벅지와 종아리가 이렇게 뻐근한 것은 대회 직후에 근육을 제대로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알고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이렇게나 힘들다. 인간은 왜 이렇게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늘 그렇듯 과거의 나를 원망하던 중에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엇?! 그런데 다리가 언제 나았지?’


생각해보니 나는 최근 몇달 전까지 30분 이상 뛰면 오른쪽 다리의 오금-무릎 뒤쪽 오목하게 파인 부분-과 그 아랫쪽 정강이 부근이 아파와서 더 이상 뛸 수가 없었다. 거의 6개월 동안을 병원에서 도수 치료도 받아보고, 다리 교정용 깔창도 이것저것 써보고, 집에서 재활 운동도 열심히 해보았지만 잘 낫지 않아서 우울해 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더워서 오래 뛰지 못하기도 했고 다른 일들로 바빠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 다리가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안 쉬고 10km—사실 상 10.5km!—를 뛴 것은 생각해보니 꽤 오랜만이었다. 신경도 쓰지 않던 사이에 한 때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몸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어 있는 것을 보니 새삼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틀린말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은근히 잔병치레가 많았다. 어릴 때는 갑자기 원인 모를 두통으로 고생한 적도 있고, 잦은 복통에 시달렸으며, 갑자기 손 발에 물집에 퍼져서 온 피부가 벗겨져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그 밖에도 밝히기 민망하기도 한 다양한 잔병치레를 하면서 살아왔는데, 모두들 내가 나름의 조치를 취한 뒤 신경 쓰지 않았더니 어느새 몸에서 도망가 있다. 어쩌면 마음의 문제도 마찬가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고민의 행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꽤 가까운 과거의 걱정도 어느새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몸과 마음을 돌본다는 건 사실 한번은 깊게 들여다 봐주고 이후에는 괜찮아 질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이려나. 나는 최근 몇 개월간 유난히 몸과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서른 중반의 그렇게 적지만은 않은 나이에 안정성을 포기하고 호기롭게 선택한 스타트업이라는 도전이 지난 몇 개월간은 나에게 꽤나 벅차게 다가왔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갑자기 소화가 잘 안되고 피부도 많이 안좋아졌다. 유산균도 잘 챙겨먹고, 양배추즙도 사서 먹고 있고 나름의 조치를 하고 있지만, 좀처럼 좋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두 증상 모두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데, 내가 직접 선택한 이 환경에서 나는 무엇을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걸까? 고민한다고 바뀔 것도 없으니 가질 수 없는 건 깔끔하게 포기하고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마음 먹는다. 그래서 잠도 잘자고, 술도 잘 안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어느새 다리가 나은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제 신경 덜 쓰고 시간만 지나면 된다!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또 다시 쓸데없는 고민에 휘둘릴테고, 골골대는 몸과 마음을 돌보느라 고생깨나 하겠지. 아주 먼 미래의 나는 더욱 성숙해져서 고민 없이-는 힘들 것 같고 덜 하면서- 살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시간은 좀 걸리겠지? 그러므로 가까운 미래의 나에게는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힘내라! 밥 잘 챙겨 먹고! 난 일단은 잠이나 잘란다.



*항정상태란 생체 활동이 동적 평형을 이루는 상태를 말한다. 운동 생리학 측면에서는 운동 등의 신체 활동을 지속하면 운동 상태에 맞춰 체온, 심박수, 호흡량 등의 상태량이 일정하게 평형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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