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안식월

엄마의 노동이 잠시 멈춘 사이

by 박주호

“엄마 오늘 입원하셨어. 연락 한 번 해봐.”


월요일 오후, 업무 중간에 오랜만에 들여다본 핸드폰에는 이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둘째 동생이었다.


“입원...? 왜?”


“어깨 수술.”


갑작스러운 소식에 일단 어깨 수술이라고 하니 죽을병은 아니겠구나 하면서, 나는 이틀 전 본가에 갔을 때 들었다가 놓친 소식이 있었는지에 까지 생각이 미치고 있었다. 엄마는 회사에서 어깨를 많이 쓰면서 올해 초부터 어깨 통증이 생겨 주기적으로 물리치료를 받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수술이라니, 그렇게까지 심했던 걸까. 일단 사무실 밖으로 나가 엄마한테 곧바로 전화를 했다. 엄마는 내일 수술이라고, 원래 다니던 작은 병원에서 회전근이 파열돼서 수술이 필요해서 큰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고, 아빠가 지인한테 전에 추천받았던 병원을 오늘 와서 진료를 받고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수술을 하면 당분간 일을 쉬어야 하는데 추석 연휴 때문에 더 미루면 시기가 애매해진다고, 여러 가지 자초지종을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렇구나.. 그렇게 많이 아팠었어요? 엄마 무섭겠다. 이런 수술 처음 아닌가?”라고 물으면서도 나는 수술 소식을 듣고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이제 처음 듣는 것이라는 사실에 먼저 안도하고 있었다.


“아팠지! 어깨가 안 올라갔는데! 무서워~ 엄마 수술 처음이잖아.”


“그래도 이제 그만 아프려고 수술받는 거니까 씩씩하게 받고 와요.”


전화를 끊고, 몇 시간이 지나자 아빠한테도 엄마가 입원을 하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가족 사이에 어떤 일이 알려지는 데에는 순서가 있다. 우리 삼 형제 중 독립한 사람은 아직 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집안의 소식을 제일 늦게 접하는 것은 항상 나였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마주치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가족들 사이에도 굳이 전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생기고, 축약하고 생략하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세대 분리의 과정이자 한 명의 사람으로서 분리된 독립적인 어른이 돼 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독립을 하기 전에도 우리 집에서의 정보 전달 체계의 (특히 좋지 않은 소식에 대해) 마지막 단계였던 것 같다. 이게 어쩌면 내가 엄마의 수술을 미리 알았는지 몰랐는지 여부에 유난히 신경 쓴 이유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동생이 가출했던 것도 며칠 만에 알게 되었고(같은 방을 쓰고 있음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충격적이다.), 아빠가 입원한 것도 (가벼운 외과 수술이었지만) 며칠 뒤에 알게 되었고, 그 밖에 가족들의 상황 변화나 집안 사정 등을 나는 항상 늦게 알게 되었다. 부모님 눈에 나는 항상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바쁘고 정신없을 것이라 여기며 내가 신경 쓸 일이 없도록 하려고 하셨다. 집 안이 언제나 잘 굴러가고 걱정할 것이 없다고 느끼게 하려고 하셨던 것 같다. (부모님의 그런 노력은 사실 그렇게 성공적이진 못했는데, 그건 나의 잠귀가 너무 밝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집안 소식은 제일 늦게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그것을 배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내가 바쁘다고 가족들을 신경 쓰지도 못하는 것에 부채감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가족들의 안부를 묻는 내 마음속 깊숙한 내면은 가족들을 챙기고 싶은 마음이 먼저일까,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일까.


엄마의 어깨 수술은 오후 늦게 있었고, 수술 당일은 1명만 면회가 돼서 아빠가 엄마 곁을 지켰다. 다음날 퇴근 후 병문안을 가서 만난 엄마는 통증과 약 기운으로 기진해 보였다. 지쳐 보이는 엄마를 쉬게 두고 아빠와 식사를 하러 나갔다. 아빠랑 단 둘이 식사를 한 게 얼마 만인가. 병원 근처에는 마땅히 먹을 게 없었었기 때문에, 우리는 천천히 대로변을 걷다가 해물 누룽지탕 집이 눈에 보여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아빠는 뱅킹 앱에서 안 되는 게 있다며 내게 핸드폰을 맡기며 부탁하셨다. 옛날에는 아빠의 핸드폰 관련 이슈를 처리를 하는 것이 귀찮을 때도 많았다. 회사들은 앱을 만들 거면 좀 더 UX를 쉽게 짤 수는 없는 것인가? 서비스는 왜 이리 복잡한 것인가? 세상의 수많은 자식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전 세계 모든 아빠들은 아마 가장 믿음직스러운 자식에게 핸드폰을 맡길 것이다. 나는 아빠가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자식이다(라고 마음을 다스린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눌러보며 이슈를 처리하다 보니 기다리던 누룽지탕이 금방 나왔다.


“엄마가 수술 끝나고 울었다더라.”


아빠는 누룽지탕 첫 숟갈을 뜨기 전에 담담히 말했다. 나는 순간 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간호사가 그러더라. 수술 끝나고 울더라고. 간호사가 ‘수술 잘 됐는데 왜 우세요’ 하고 달래줬단다. 너희 엄마가 외삼촌 돌아가실 때도 병간호를 얼마나 열심히 했냐. 그렇게 병간호하던 병실에 자기가 누워 있게 되어서 그랬나. 생전 병치레 없던 사람이 갑자기 아파서 그게 서러웠나.”


아빠의 핸드폰만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잠깐 들어 아빠를 봤다. 그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박고 누룽지탕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빠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마땅한 대답이 생각이 안나기도 하고, 나도 까딱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이 있었기에 누룽지탕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누룽지 탕은 맛있었다. 아빠는 누룽지탕을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아빠도 해물 누룽지 탕 참 맛있다고 하셨다.


몇 달 전 외삼촌은 간암을 늦게 발견하게 돼서 정말 갑작스럽게 불과 몇 개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형제들과는 왕래가 없었지만, 막내여서 언니만 3명인 엄마에게는 유일한 오빠였다. 엄마는 외삼촌이 병원에 계신 마지막 한 달 동안 정말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열심히 돌보셨다.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병원이었다. 나는 일과 이사 준비로 한창 바빴던 시기였기 때문에, 엄마를 더 자주 못 볼 때였다. 엄마는 볼 때마다 살이 빠져있었고, 외삼촌의 장례식 날에는 더욱 말라 있었다.


병실로 돌아와 엄마의 병실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엄마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엄마의 얼굴색은 하얗게 창백했고, 언제 그렇게 말랐는지 눈두덩이는 푹 꺼져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울었느냐고, 무엇이 슬펐냐고 물어보는 대신, 회사 사람들은 연락 온 사람 없냐고 물어봤다.


“응, 괜찮냐고 연락 오지. 다들 엄마한테 아프기도 하냐고 그런다. 다들 신기해해. 엄마가 이렇게 아파본 적이 없잖아. 나이 앞에는 장사가 없다. 근데 엄마 일할 때 요령 없이 너무 열심히 하기도 했어.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엄마는 회사에서 안 아프고 열심히 일해왔던 스스로에게 자부심이 있는 듯 보였다. 엄마의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까. 하긴 수술 직후 병실에 누워 마취가 풀리는 것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무엇보다도 무섭다. 가장 무서운 고통은 다가올 것이 확실한 예비된 고통이다. 큰 병이 회복이 되려면 일단 아파야 한다. 회복이 될 것이라는 그 희망을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의 빈도와 크기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높아질 것이다. 외삼촌의 항암치료와 고통은 그 짧은 기간에도 시간이 갈수록 그 주기가 짧아지고 고통도 커졌다. 엄마에게 힘든 노동의 시간은 다르게 보면 젊음의 시간이었다. 엄마는 마취가 풀리고 회복을 위해 견뎌야 할 고통이 노화의 시작이라고 느꼈을까. 엄마의 노동의 시간이 끝나가고, 외삼촌이 누워있던 병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그 병실에서 다가올 고통을 죽음과 연결 지어 버린 게 아닐까.


엄마를 병원에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려고 해 보았지만,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그 작은 몸으로 아들자식을 셋이나 낳았는데, 게다가 나는 3.8kg 우량아였는데, 엄마에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회복될 게 거의 확실한 수술로 병실에 누워 있는 중에도 눈물을 흘렸던 엄마가 우리 형제들을 낳을 때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무서움을 이겨내고 우리를 키워낸 긴 시간, 그 길었던 육아와 노동의 시간이 무겁게 다가온다. 괜스레 초조해진다. 어서 자리를 잡아서 효도도 하고 기쁘게 해주고 싶은데 너무 늦지는 않을지. 나의 노동의 시간이 무르익어 열매를 맺기도 전에 엄마의 노동의 시간이 저물어 가는 것이 아쉬워 책이 읽히지 않는 것이다.


한주가 지나 엄마가 퇴원하고, 며칠이 지난 후에 본가에 가보니 집안의 남자들이 조금씩 바빠진 게 눈에 보인다. 엄마가 오른쪽 팔을 아예 못쓰게 되니, 본래 청소 담당이던 아빠가 설거지에 분리수거까지 담당하게 되었고, 종종 둘째도 요리랑 설거지를 하는 모양이었다. 막내는.. 이제 조금은 일찍 집에 들어온다고 한다. 엄마는 출근도 안 하고 집에서 쉬니까 너무 좋다고 하신다. 몇 달을 병간호하고 병치레하며 빠졌던 살이 출근 안 하고 덜 움직이니까 다시 뱃살로 간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시기도 한다. 나는 그래도 엄마의 얼굴이 단 며칠 만에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집 가는 길에 둘째 동생이 근처를 데려다 달라고 했다. 차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중에 둘째가 툭 던지는 한 마디.


“막내가 내년에 식장 잡았다던데? 아직 엄마,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아, 집안 모든 소식은 이제 둘째를 거쳐 뿌려지는구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부모님이 제일 늦겠다.


“오, 그래? 벌써…? 음… 잘 됐네. 할 거면 빨리 해야지.”


부모님에게 얘기도 안 하고 식장을 잡아버린 건 황당하긴 하지만, 동생을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의 입가에는 은근한 미소가 지어진다. 동생의 결혼 소식에 기쁜 마음이 생겨서일까, 부모님보다 소식을 일찍 알게 되어 생겨난 동생들과의 작은 소속감 때문일까. 어쨌든 가족 간의 나쁜 소식은 언제 전달 받든 슬플 것이고, 좋은 소식은 언제 들어도 웃음이 지어질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안 좋은 소식은 늦게 주어 슬픔을 지연시키고, 좋은 소식은 일찍 주어 어서 웃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엄마의 수술 소식은 들을 땐 안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좋은 소식이었다. 이 참에 엄마가 푹 쉬었으면 좋겠지만, 엄마는 벌써 회사에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


문득 여태 생각해내지 못했던 당연한 생각을 해낸다.

깜짝 안식월이 생긴 엄마를 데리고 조만간 서울 근교로 드라이브를 다녀오자. 노동의 시간을 붙잡고 싶은 엄마가 금방 다시 가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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