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의 최소단위

소개팅이라는 이름의 투자설명회(IR)에 관하여

by 박주호

"저는 이 버스 타면 돼요! 가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네~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급히 떠나는 뒷모습에 대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다. 긴장이 풀리니 이제야 손이 시리기 시작한다. 나는 이제 마음 편하게 양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방금 전 그녀와 나란히 걸을 때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건 왠지 폼이 나지 않는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소개팅녀를 태운 버스가 신호가 바뀐 사이 잽싸게 나를 지나쳐 스쳐 간다. 하필 버스 안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나에게 고개를 끄덕한다. 나도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다시 손을 주머니에서 빼며 맞인사를 건넨다. 동시에 오늘이 몇 번째였는지 가늠해 보려고 속으로 숫자를 세어본다. 6번째이던가 7번째이던가.. 10번이 넘었던가.. 판에 박힌 대화와 형식에, 방금 헤어지는 그녀와 그 이전과 그 이전과 그 이전의 그녀들의 이름, 얼굴, 직업, 나이 모든 것이 뒤섞이며 헷갈리기 시작한다.


소개팅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다소 진지하다. 보통 사람들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보다도, 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정말 진지한 만남—결혼 상대를 찾는다든지—을 원한다는 그러한 종류의 진지함은 아니다. 나의 진지함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서 서로가 즐거운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는 인류애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주선자의 노력과 입장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상대방의 피, 땀, 눈물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적지 않은 돈, 시간, 감정,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에 적어도 좋은 시간으로 기억하고 싶고 기억되고 싶다는 다소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상대방에게 나에 대한 호감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소개팅을 위해 사용한 일련의 시간들을 좋은 시간으로 기억시키기 위해서 내가 하는 노력은 어떻게 보면 기업의 브랜딩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나'라는 아주 작은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브랜딩의 가장 작은 단위로 본다면, 소개팅 자리는 나의 브랜딩의 결과를 몇 시간 안에 증명해 내는 자리가 아닌가? 이런 질문을 머릿속으로 하다 보면 그렇게 나는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내 인생을 증명받기 위해 더욱 진지하게 소개팅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소개팅 전 연락처를 받은 시점에는 최선을 다해 소개팅 장소를 찾는다. 소개팅 상대와 나의 집 혹은 직장 위치를 고려하여 최적의 지역을 먼저 고른 뒤, 구글 맵, 네이버, 캐치테이블 등을 활용해 예약 가능하고 평이 좋은 식당 리스트를 3개 정도 추려 고를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소개팅 중에는 상대가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주제로 질문거리를 만들고, 상대가 막힐 경우를 대비해 각 주제별로 말할 거리를 만들어 놓는다. 여행, 영화, 드라마, 음악, 미술 등 끊이지 않는 질문 폭격으로 상대의 혼을 쏙 빼놓는다.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더욱 할 말이 많아진다. 수년간의 드라마 시청으로 섭렵한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질문을 이어가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면 나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IT회사에서 대치동 수학 강사를 거쳐 스타트업에 다니게 된 과정을 설명하다 보면 어느새 기업 투자설명회에 버금가는 발표회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이스브레이킹이 끝나고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상형과 연애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높은 확률로 배울 점이 있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하는 그녀들에게 '그러면 수학을 제대로 한번 배워보시겠어요?'라고 되묻는 것 또한 어느새 반복적으로 내뱉는 레퍼토리이다.


오늘의 소개팅도 딱 이와 같이 흘러갔고 나는 재밌고 만족스러운 토크쇼를 마친 기분으로 귀가를 하고 있다. 토크쇼라니. 소개팅이 토크쇼라니? 문득 나에게 있어 소개팅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본다. 소개팅 상대방은 어떤 사람이었지? 그녀들이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기는 했던가? 나는 만인의 연인이 되려는 것인가? 나는 단지 나의 가치를 확인하는 용도로 소개팅 자리를 이용한 것이 아닌가? 안정적이라 생각했던 장기 연애 끝에 이별을 하며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나는 못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 편의 연극을 준비해서 선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여태껏 주선자와 상대방을 무시해 왔던 것은 나 자신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철저히 무시해 왔다. 나는 모두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나와 맞는 단 한 사람만 찾으면 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려고만 하고 있다... 그렇게 쇼를 한번 하고 나서 스스로 만족감에만 젖어있고 더 이상의 액션은 취하지 않는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이제야 오늘의 소개팅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진다. 그녀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었고, 나와 잘 맞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소개팅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한번 더 만나보고 싶은 여자였다. 집에 도착한 후,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남긴다.


"잘 들어가셨나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혹시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씻고 오니 그녀에게서 답장이 와있다.


"저도 즐거운 시간 보내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ㅎㅎ 다만 요즘 너무 바빠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여유가 없을 것 같아요 ㅠㅠ 멋지신 분이라서 좋은 사람 만나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응원하겠습니다!"


...


첫 술에 배부르랴. 사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를 거절한 그녀에게 괜히 심술이 나서 그녀는 눈매가 조금 사나웠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억을 조작하고 스스로 합리화를 하고 나니 다시 마음이 안정된다. 다소 하남자스러운 부분이지만.. 아무튼 나는 이제 소개팅의 새로운 의미를 알았으니, 앞으로는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좀 더 나와 잘 맞는 인연을 찾기 위한 자리임을 상기하며 더는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이런 나를 사랑해 줄 한 사람을 찾는데 더욱 집중할 것이다. 더 이상 만인의 연인이 될 필요는 없고, 소개팅은 나라는 브랜드를 증명해 내는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침대에 눕는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나를 재우고 숙성시키기 위해 잠을 청한다. 거절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아 이불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는다. 습관처럼 유튜브 앱을 연다. 자연스럽게 스르르 잠들 수 있게 적당히 지루한 영상을 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았는지 유튜브 알고리즘의 유혹에 못 이겨 결국 다른 영상에 손가락이 향하고야 만다.



'이렇게만 하면 소개팅 100% 성공! 3가지만 기억하세요!'




※ 이 글은 허준 작가의 책 『저는 브랜딩을 하는 사람입니다』에서 영감을 받아, 지난 소개팅들을 '브랜딩'의 관점에서 복기해 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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