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직장인 대표 허언증 중 하나.
"나, 퇴사할 거야."
퇴사는 아무나 못 한다. 퇴사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건, 무작정 현재 다니는 회사를 나가버릴 수 있는 자만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퇴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함부로 실천하지 못한다. 매달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무책임하게 보이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직장인들의 퇴사라는 단어는 대부분 허언에 그친다. 나는 이 허언이 사실이 되도록 실천한 흔치 않은 사람 중 하나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의지가 약하고 참을성이 없다고 나무라고 다그쳐도 어쩔 수 없었다. 다들 하기 싫은 일도 꾹 참고 한다고? 나를 가르치려 들거든 그에 걸맞은 자격증(망해가는 기업에서 자의로 3년을 버틴다면 발급해 드립니다)을 들고 오시라.
사실 나는 도망친 게 맞다. 매일 잠자리에 누우면 출근 시간이 빨리 다가오는 게 무서워서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더 이상 회사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느꼈고, 사방이 막혀 있는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지인들은 나의 용기를 칭찬하고, 그렇게 그만둘 수 있는 것을 부러워했다. 그렇게 보인 것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퇴사 소식을 알릴 즈음이면 이미 다음 일에 대한 갈피를 잡은 뒤이기도 하고, 초조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더욱 침착한 태도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초식동물이 포식자에게서 벗어나듯 줄행랑을 친 것이고, 이 글은 그에 대한 변명이다.
어느 시점까지 인생의 난이도는 내가 참아내고 이겨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인생이 쉬웠던 적은 없었다. 입시 준비를 할 때도, 짝사랑을 할 때도, 대학원에 다닐 때도, 회사를 다닐 때에도. 때로는 묵묵히 견뎠고 멋지게 승리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쟁취한 그 얕은 승리의 경험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그 경험은 애매하게 성숙해진 내가 힘든 일에서도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목 안의 가시가 된 형국이었다. 마치 고개를 똑바로 세우면 가시가 속살을 푹 찌르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 목소리가 내 마음을 푹 찔렀다. 가시에 찔리지 않게 어정쩡하고 불편한 자세로 몇 년을 버텼다가 몸과 마음이 안 좋은 자세로 굳어졌고, 결국 나는 그 가시를 뽑아버리기 위해 처음으로 직장에서 도망친 것이다.
첫 직장에 대한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근무지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석사 전공과 어느 정도 연결고리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공 특성상 서울 근교에서 근무지를 찾기가 어려웠지만, 당시 만나던 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기 싫었던 탓에 대체 복무 회사를 찾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취직에 성공했을 때, 병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드디어 돈을 벌어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1년은 새롭게 배우는 일들도 재미있었고 성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2년 차에 업무가 바뀌면서 무언가 꼬이기 시작했다. 맡겨진 일이 내 수준에서 해결하기 어렵기도 했고, 사업적으로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몇 년 동안 많은 인원이 붙잡고 있었던 회장님의 자아실현 프로젝트였기에 누군가는 맡아야 했다.) 그 후 1년 반 동안 그 일을 하며 나는 성과도 안 좋아지고 출근하는 것 자체가 괴로워졌다. 1년 반 복무 후에는 이직도 가능했지만, 도망친다는 것은 겁쟁이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스스로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묵묵히 하며 3년의 복무 기간을 채우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그 와중에 프로젝트는 무산되고 관련 팀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이미 회사에 대한 마음은 떠버린 뒤였다. 이후 새로 시작한 업무에서는 다시 성과도 좋아지고 나름의 재미도 있었으나, 그때는 이미 나에게 노동의 의미가 달라진 뒤였다.
그즈음에 우리 집에 고양이 '국수'를 데려왔다. 묘생(猫生)은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다. 사냥-식사-그루밍-수면이라는 사이클을 평생 반복하며 살아간다. 집사로서 고양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은 간단하다. 고양이가 현재 루틴 중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채고 그 욕구를 채워주면 된다. 주말에 하루 종일 국수와 함께하며 그 '냥팔자'를 시샘하는 것은 나의 소소한 행복이 되었다. 대부분의 동물은 이렇게 반복되는 사이클 안에서 평생을 먹고 산다. 인간은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면 예측 가능한 하루의 생활 루틴을 스스로 벗어난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자 불행의 씨앗이 아닐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느끼고 열정을 쏟지만, 동시에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스트레스를 받고 절망한다.
처음엔 첫 직장도 희망이었다. 그러나 희망은 어느새 절망으로 바뀌었고, 대체 복무 시간을 버티기 위해 나는 나름의 행복을 찾아야 했다. 그때 나는 행복을 '일상의 반복' 속에서 찾았다. 명곡은 천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냄새만 맡아도 어떤 맛인지 아는 음식을 먹는 것은 행복이다. 모퉁이를 돌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훤히 알고 있는 산책길도 기쁨이 된다. 노동에서 얻을 수 없던 행복을 노동 외의 것에서 찾아가며 절망 속에서 겨우 버텼다. 그리고 대체 복무가 끝나는 전역일 당일에 나는 퇴사했다.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서, 작은 행복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다음 직업을 고를 때에는 반복되는 일을 통해 노동에서도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몇 년 뒤, 무작정 학원 강사를 그만두었다. 두 번째 도망이었다. 반복하는 일에서 오는 안정감은 확실히 있었지만, 건강과 인간관계 등의 문제로 지속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여기서도 완전한 희망을 찾지는 못한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는 더 쉬웠다. 나는 희망과 행복을 모두 찾으려는 욕심쟁이였다. 동물로서의 우리는 일상의 반복에서 안온함을 얻고, 인간(인지적 존재)으로서의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간다.
나는 이제 행복을 위해 하루의 루틴을 더욱 견고히 쌓아 올린다. 아침에는 양배추즙과 토마토, 올리브오일. 업무 후 점심 운동과 단백질 위주의 식사. 오후 업무 후 퇴근. 퇴근 후 OTT를 시청하며 하는 집안일.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국수의 그루밍을 보며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든다. 고양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꿈을 꾸는 회사를 통해 희망을 찾는다. 이제는 두 번을 도망쳐본 어른으로서 지금의 희망에 모든 것을 걸진 않는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는데도 다시 절망이 온다면, 나는 그 안에서 또다시 희망을 찾아 나설 것이다.
나에게 '도망'이라는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이, 나의 또 다른 희망이 된다.
P.S. 이 글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를 읽고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 책 속 인물들은 절망과 가짜 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저는 '도망'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영원한 춤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