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의 원천
“내가 쓰는 것은 초언어일세. 소설을 언어라고 하면 비평가는 메타언어를 쓰거든. 언어에 대한 언어이기 때문에 비평가가 쓰는 언어는 다 메타야. 가령 농구선수는 필드에서 뛰는 선수고, 코치는 바깥에서 플레이를 지시하는 메타선수인 거야.”
나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 찾기 힘들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다. 콧대가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 높이 솟아 있다. 이런 나에게 열등감을 안겨주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있다. 88올림픽 개막식의 굴렁쇠 소년, 디지로그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바로 이어령 선생님이다.
이분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직접 영상을 보자. (23분 47초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mgBIIB1hTzE
작업실이 온통 디지털로 꽉 차 있다. 컴퓨터만 다섯 대. 스캐너, 태블릿, 펜 마우스 등, 20대인 내가 본 적도 없는 첨단 기계들은 배우고 익힌 내용의 집합을 ‘보고(寶庫)’로 만들어준다. 손으로는 필기하면서 입으로는 반복했던 것이 실시간으로 고스란히 저장된다. 여든이 넘은 연세임에도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으시는 것도 놀라운데, 날아가는 생각의 잔상을 그때그때 저장하는 선생님만의 노하우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작업과 지식 습득을 노트북과 휴대전화, 그것도 최신 기종이 아니라 보급형을 쓰면서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서점을 오가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 베스트셀러 칸에 자리하고 있음은 알았다. 하지만 대부분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습관 때문에 사고자 하는 충동이 일지는 않았다. 그러다 좋은 기회로 출판사에서 책을 무료로 보내주어 읽게 되었다. 나보다 똑똑한 분(?)이기에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철학, 사회학, 과학을 아우르는, 통섭(統攝)이 묻어 있는 이어령 선생님의 수다. 내가 앞으로 평생에 걸쳐 읽어야 하는 책을 먼저 다 읽으시고 당신의 언어로 재해석한 지혜였다. 선생님의 혜안으로 본 세상은 깊이가 있기에 내게 낯설었지만, 감사하게도 적확한 단어로 명징하게 풀어내 주셨다. 그 덕에 선생님의 시선과 궤를 같이하기가 수월했다. 쉬운 어휘를 써야만 이해가 쉬워진다는 선입견이 깨졌다.
다만 이어령 선생님 당신께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경계하셨듯, 나 역시 책을 읽으며 물음표 부호를 마음속으로 그렸던 대목도 여럿 있었다. 이어령 선생님의 죽음에 대한 탐구는 당신의 젊은 시절에도 이루어졌을까? 보통의 사람에게 ‘죽음’은 ‘나의 일’이 아니다. 아주 가까이 있지만 멀다고, 남의 일이라고 느끼는. 특히나 어렸을 때는 더더욱. 죽음이 목전에 다가오니까 비로소 삶의 감사함을 설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같은 맥락에서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전부 선물이었다는 말씀에도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살아있음이 고통인 사람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분야를 의식의 흐름대로 넘나들며 막힘 없이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부러웠다. 선생님은 ‘이야기가 많은 분’일 뿐 아니라, ‘공부도 많이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책에 면담자의 선생님을 향한 무조건적 예찬이 실려 있어 읽기에 오글거렸지만, 선생님의 일생 이야기는 분명 범인(凡人)의 삶과는 차이가 있었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미래에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유는 마음대로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함부로 바꾸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다른 누구의 말보다도 이어령 선생님이 가진 식견이 훌륭한 자극제로 작용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