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모 3년 차, 어른 6년 차
필로티 빌라를 떠난 나와 내 동생은 분리형 원룸으로 이사를 갔다. 그 방을 처음 보러 갔을 때, 발 뒤꿈치로 쿵쿵 걸어보고는 감탄했다. 아니, 바닥에서 빈 깡통 같은 소리가 나질 않고 튼튼한 시멘트 바닥만 느껴진다니! 이번엔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나 혼자서 계약금이라는 것도 걸어보았다.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에도 이런 것을 내가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젠 정말로 나 혼자 그런 것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졸업과 동시에 교수님의 추천으로 곧바로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은 판교에 있었으므로 동생은 나와 함께 살던 자취방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동생이 기거해던 분리형 원룸은 어쩔 수 없이 창고가 되어버려다. 결국 나는 또다시 혼자 살게 된 것이었다.
생활이 급변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동생과 함께 살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자연스레 혼자 사는 일에 너무 쉽게 익숙해져 버렸다. 그 당시의 생활도 굉장히 안정되었다. 주 4일 회사를 다녔고, 주말이면 아빠의 가게 일을 도왔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이었다. 하지만 그땐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쳇바퀴 같은 삶이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언제쯤 실감할까. 나의 경우,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취업을 했을 때도 아니었다. 내가 진심으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을 때는 내 몸에 변화가 생겼을 때였다. 쉽게 말해 몸이 아팠을 때였다.
감히 20대가 몸 아픈 이야기를 하면 그보다 더 어른인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겠지만, 생애 처음으로 내 몸이 영원히 젊지 않고 조금씩 낡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충격은 꽤나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게는 관절염이 생겼다. 뜬금없게 20대에 관절염이 웬 말인고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때는 주말이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마냥 걷는 것을 좋아했던 바, 그날도 평소처럼 직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기 위해 마냥 걷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무릎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짜릿한 통증이 일었다.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생소한 통증. 순간 '이거 잘못됐는데?'라는 확신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런 일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의사가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갑자기 나 심근경생인 것 같다,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119를 부르고 바닥에 누웠는데 진짜 심근경색이었다는 이야기. 그런 거였다. 바로 느낌이 왔다. 병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하면 곧 통증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난 몰랐다. 내가 대학병원까지 가게 될 줄은 말이다. 심지어는 그 통증을 평생 달고 살 거라는 것을 말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가벼운 통증 정도는 다 낫던 그 시절의 나는, 평생 낫지 않을 뭔가가 생기는 것이 마냥 딴 나라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평일이 되자마자 생전 처음으로 관절 관련 병원을 가게 되었다. 관절이라 하면 대게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연관이 있는 줄로 알았건만 내가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병원에서 무릎 X레이를 찍었다. 놀랍게도 X레이로 찍힌 내 무릎은 확연히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뼈가 휘어질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허벅지 안쪽 근육이 바깥쪽 근육보다 약해져 있네요."
그 의사는 말했다. 그로 인해 '무릎연골연화증'이라고, 무릎의 연골이 약해지고 손상되면서 생기는 질환이 생겼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지나가듯 말했다.
"한 마디로 관절염이 생긴 거죠."
관절염. 그때 그 단어를 처음 들었다. 내가 관절염이라고? 대체 왜?
"원인은 다양해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근육량이 적어져서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여성분들 같은 경우에는 골반 구조상 무릎이 더 약할 수밖에 없고요. 굽 높은 신발을 많이 신어도 무릎에 무리가 갈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갑작스럽게 무릎에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의사는 충격파 치료와 약물치료, 그리고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렇게만 하면 무릎 쪽의 뼈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거였다.
"연골은 더 나아질 수는 없어요. 이런 통증은 만성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앞으로 잘 관리해야 하죠."
더 나아질 수 없다니. 만성이 될 수도 있다니. 게다가 20대 중반에 무릎 통증이 이 정도라면 대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나빠질 것이란 말인가. 그 의사는 내게 앞으로 평생 하면 안 되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굽 높은 신발 신기, 쪼그려 앉기, 오래 서 있기 등등... 이십 대 인생에 갑자기 앞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버린 것이다. 순간 공포스러웠다. 그래서 무릎 한 짝당 10만 원 가까이하는 충격파 치료라는 것도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그 공포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돈을 그 충격파 물리치료에 쏟아부었는지 감도 오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아마 병원의 상술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공포와 우울감에 빠져 있던 20대에게 무슨 말이 들렸겠는가. 그땐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예전과 같은 '낡지 않은 몸'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더랬다. 예를 들어 더 이상 횡단보도의 초록불이 깜빡인다고 해서 뛰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한 발짝씩 옆으로 내려왔다. 걸을 때도 혹여나 찌릿하는 통증이 일어날까 조심조심 걸었고 그러다가 또다시 무릎에 가시가 박히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면 무력감을 느꼈다. 그렇게 내 무릎을 애지중지하면서 살기를 한 달 정도 했을까. 어느 순간 옆을 보니 내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할머니랑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무릎 통증의 정확한 원인을 알아낸 것은 2차 병원에서였다. 거기에서는 무려 MRI라는 것을 찍었다. 그런 거대하고 시끄러운 기계 속에 하반신만 집어넣고 있었을 뿐인데도 없던 폐쇄공포증이 생길 것 같았다.
"반월상 연골이네요."
2차 병원의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무릎 연골은 원래 가운데가 뚫려 있어야 해요. 그래야 허벅지 뼈와 종아리 뼈의 마찰을 견딜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환자분은 자, 보세요. 뚫려 있어야 할 곳이 막혀 있죠. 반원형 모양이에요. 이러면 허벅지 뼈와 종아리 뼈의 마찰을 연골이 다 받고 있는 거예요. 말하자면 '연골 기형'인 거죠."
"오..."
"기형이지만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기형이에요."
의사의 진단을 받는데 기형이고 뭐고 속이 다 시원했다. 알 수 없는 이 통증을 속 시원이 밝혀낸 기분. 아, 그래서 그랬던 거였다니! 이제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내가 왜 무릎 통증이 생겼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그 후로 나는 그 병원에서 충격파 치료를 받았고 심지어 무릎 연골 주사까지 맞았다. 그 의사는 통증이 지속되면 반월상연골을 잘라서 정상적인 연골로 만드는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수술도 진지하게 고려해 봤다. 마치 목구멍에 박힌 가시를 빼내는 것처럼, 수술 한 방으로 모든 통증을 다 없애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병원을 가고 나서 상황이 급반전 되었다.
"반월상 연골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당황스러웠다. 기형이 아니라니. 상황에 진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퇴보하다니.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혼란스러웠다. 2차 병원의 말이 맞는지 대학병원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내 무릎 연골조차도 가짜 어른의 인생처럼 이도저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것이란 말일까?
그 의사는 그 흔한 약이라든지 충격파 물리치료도 권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저희 병원이랑 연계된 스포츠센터에서 운동을 배워보시는 건 어떠세요?"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대학병원의 스포츠센터라는 곳을 가봤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곳에서의 측정을 통해 내 다리 근력이 평균 여성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 길로 제대로 된 운동법을 배웠고, 집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3개월 동안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을 단련시킨 결과 정말 신기하게도 무릎 통증을 확실히 줄일 수 있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은 비싼 치료가 아닌 운동이었던 것이다.
만일 내가 병원을 한 군데만 다녔더라면 멀쩡한 무릎을 수술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병원은 무조건 여러 군데를 다녀야 한다. 병원도 병원 나름이다.
물론 내 무릎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첫 번째 의사의 말대로 평생 관리해야 하는 만성질환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20대에 느꼈던 그런 공포심은 없다. 이젠 그 통증을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내 몸이 낡는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그걸 받아들이게 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내가 달리기 3등 안에는 들었던 초등학생 시절의 체력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하루 자고 나면 모든 피로와 통증이 싹 가시는 그런 근육몬이 아니었다. 그저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퇴화될 뿐인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극도로 발전된 이 현대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것은 난치병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현대 의학도 치료할 수 없는 '보통의 질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그러려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증도 일상이 될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평생 떠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찌어찌 잘 살아왔다. 삶을 견딘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사실 고백하건대, 내가 무릎이 아플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원인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무릎을 꽤나 혹사시키고 있었다. 먼저 주말마다 매일 서 있어야 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평일에는 사업장의 물품을 조달하는 일로 반나절 동안 쭈그려 앉아야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릎을 혹사시킨 일이 있었으니, 바로 오래 걷기였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무작정 걸었다.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걸었다. 무릎이 뜨거워질 때까지 그랬다. 그렇게 걸으면서 현실에서 벗어난 환상의 세계를 상상했다. 현실의 불안감을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현실도피였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은 마치 볼트와 너트가 꽉 조여지지 못한 것처럼 무릎이 덜그럭 거리기 시작했고, 시리거나 딱딱거리는 소리도 났다. 그게 전조증상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의 불안감이 내 무릎을 악화시켰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사실을 나로부터, 다른 사람들로부터 숨기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불안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대체 무릎이 아픈 원인이 무엇이냐고, 어떻게 무릎을 썼길래 그런 것이냐고 물었을 때에도 그 원인만 쏙 빼고 대답했던 것이다.
사실 '너무 많이 걸어서요'라는 대답은 얼마나 바보 같은가. 게다가 또 얼마나 많은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일이던가. 그러니 그냥 '요새 너무 많이 무릎을 써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그런 두루뭉술한 답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내겐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