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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휘 Oct 11. 2024

지하에서 천국으로

1화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 있다. 슬픔에 앉고 있으며, 우울함을 안고, 또 안으며 

여기에서 살아간다. 나는 왜 죄인의 아들로 태어났을까. 죄인의 아들이 아니라면, 내가 여기에 있어야 할 필요도, 책임도 없지 않을까. 


앞서 말했지만, 나는 태어남부터 실패다. 패배자의 생각이 자꾸 더해진다. 

몸은 종종 씻긴 하나, 그것도 겨우 사흘에 한 번이다. 씻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여기에 머무른 시간은 30년, 오늘은 생일이다. 

“그래도 오늘 생일인데, 샤워라도 혀”

“생일이라고 꼭 그래야 하나, 누구 보여줄 사람도 없다.”


나라고 사랑이란 감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긴 사내들로만 둘러싸인 암벽 같다. 

아 여자라고 오긴 온다. 가끔 누군가 오시긴 하지만 내 또래는 아니어서, 

신경은 안 간다. 엄마 또래다. 


형기를 다 채운 후, 사랑을 해볼까. 그게 희망적일까. 차라리 내가 부활한다는 게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사망과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글자 수는 똑같다. 하지만 단어가 부르는 감정은 같지 않다.


 그래서 난 예수가 대단한 거 아니냐는 생각을 해봤다. 또한, 사망의 고통, 암과 같은 고통을 이긴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을까. 

감옥의 특성상, 굉장히 비릿하다. 씻는 것조차 불편하다. 


죄수가 너무 많아서, 10분의 짧은 시간 동안 씻는다는 건, 마치 10분 동안 수학 문제를 풀라는 것 정도를 넘은 불쾌함이다. 

여기는 굉장히 불쾌하다. 그래도 다행인 게 가끔 찾아오는 한 꼬마와 얘기하는 순간이다. 

빛 한줄기 외에, 그나마 내가 소망을 느끼는 시간이다. 

“형은 그리 악해 보이지 않는데, 왜 갇혀 있어요?”

“아빠가 죄인이거든, 그것도 나라를 뒤흔든”

“어떻게 흔들었는데요”


우리 아버지 소개를 하기 전에, 이 나라의 시스템부터 말하는 게 옳다. 아니 그게 맞다.

이 나라는 철저한 계급사회다. 왕이 있다. 왕족이 있다. 


왕이 먹는 것들은 당연히 멋지고 빛나는 것들로만 가득하였다. 

왕의 궁전은 3층이며, 왕의 창고에는 황금이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왕은 그러나 우리의 처지를 알 리가 없다. 왕은 우리 계급의 수고를 먹고 산다. 그것들을 많이 먹어서, 배가 아주 불렀다. 


물론 이 나라에 성군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게 아니다. 그러나, 참 재수도 없게도 

이 시대의 왕은 심각한 폭군이다. 


여색이 심해서, 어머니를 탐했다. 그걸 알게 된 아버지는 왕을 죽이려 했다. 

당연히 죽이지 못했다. 왕은 아버지의 원래 계급이었던 서민에서, 최하 계급인 노예로 격하시켰다. 


“나를 죽이려 한다니, 미친놈이 따로 없군.”

나 외에도 억울한 사연으로 온 사람은 많지만, 분노는 아마 내가 가장 크지 않을까. 


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 분노와 절망을. 아버지는 모든 걸 잃었다. 

어머니를 지키려 했고, 결국 그 선택이 우리 모두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그때부터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의 죄는 곧 나의 죄가 되었고, 나는 그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가 틀렸던 걸까? 어머니를 지키려 했던 선택이 잘못이었나? 아니면 그 선택을 강요한 세상이 문제였던 걸까?


때때로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우리가 이곳에 갇혀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릎 꿇지 않았다. 그가 왕의 폭압에 굴복했다면, 나는 지금의 나보다도 더 형편없고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쩌면 나만의 형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왕을 죽이려다 실패했지만,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같은 죄를 짊어졌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행동으로 표출했고 나는 그저 생각 속에서만 머물렀다. 그래서 나는 더 비참하게 느껴진다.


오늘도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교도관들이 죄수들을 감시하는 소리다. 이 소리에도 익숙해져 버렸다. 발소리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리듬으로 울린다. 


하지만 그 발소리 속에서도 나는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 교도관들의 피로, 짜증, 그들의 감정이 발걸음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처럼, 그들도 이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다.


한 꼬마가 내 옆을 지나간다. 

그 꼬마는 여전히 밝고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형, 나가면 뭐 하고 싶어요?" 그가 묻는다.


나는 이번에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다. 나가면.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자유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겁고, 더 어렵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자유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또 다른 형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에게도 희망이라는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억압된 환경이라도, 나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희망은 나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유일한 도피처다. 희망 없이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 삶이라 할 수 없다. 아버지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강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갇혀 있고, 아직은 이곳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내가 이 감옥을 떠난다 해도, 나를 가둔 것은 이 철창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력감은 새싹처럼 내 마음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쓴 뿌리와도 같게, 무럭무럭 자라서 꽈리를 튼 지 8년은 됐다. 


내가 탈옥을 시도했을까? 않았을까? 당연히 시도했다. 지금보다도 어린 8년 전, 

22살이 되자마자 나는 탈옥을 시도했다. 


소년은 나의 탈옥을 응원하며 이런 문구를 적었다. 

‘누구나 죄인이며, 왕도 죄인이니,

당신이여 죄의 지배와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항해하게나’


무력감을 물을 마시듯 마시고 있던 터였지만, 소년의 문구를 보고 힘을 내게 되었다. 

‘그래, 아버지가 죄인이긴 하지만, 그건 정당한 행위고, 나는 이곳을 나가야겠다. ’


다만 이곳을 나간다는 건 꽤 큰 각오가 동반된 모험이었다. 이 감옥이 지어졌는지는 무려 99년, 탈옥 시도는 33번 그러나 그 누구도 탈옥에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과연 이 길을 가도 되는 걸까, 나도 34번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계속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불안은 밤이고 낮이고 찾아왔다. 밤에는 주로 초승달과 반달이 뜰 때 찾아왔다. 낮에는 많은 죄수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져, 나 혼자 있을 때 불안이 찾아왔다. 


그 소년마저 잠시 걱정했다. “형, 그 정도로 걱정되면, 오히려 다음을 노리는.”

“다음, 같은 거 노리지 않을 거야. 그 왕의 면상이라도 보려면, 나는 여길 나가야 해”

이 나라는 좋은 법, 이걸 좋은 법이라고 해야 하나? 탈옥 후 100일 동안 들키지 아니하면, 

죄수의 신분을 벗는다. 그렇기에 이걸 노리고 탈옥하는 자들이 많다. 


단, 탈옥 실패 때는 형기가 2배가 된다. 일종의 도박인 셈이다. 

나는 한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왜 이 길을 가려나, 굳이 왜 이 길을 가려나, 나는 대체 이 길을 가려는 이유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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