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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뚜로 빼뚜로 Aug 19. 2021

박강아름, 그는 왜 결혼했을까?

[씨네랩]


  세상에나, 내가 30대라니. 무슨 일이야!?

  “30대, 미혼, 여성” 


 이 사회가 나를 카테고리화하는 무시무시한 키워드들이다. 성별에 대한 만족도는 꽤나 높아 (아마도) 바꿀 일이 없어 고정값으로 상정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앞의 두 키워드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특히 10년간 익숙하게 나를 위로했던, 소위 ‘앞자리 수’가 변했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과 그 시기가 겹쳤다. 그 말인즉슨 어떤 ‘무뢰한들’의 무차별적이고 무심한 질문 폭격에 답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해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삼십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는다는.. 말 못 할 어려움을(혹은 현실 부정 단계를) 겪고 있다.     

구글 이미지 검색 키워드 : turning 30 meme.. ㅎㅎ

 아니, 도대체 왜? 

그동안 목소리를 높여 비판했던 '자존감 낮고 나이가 세상에 전부인' 그런 부류가 바로 나였단 말인가?

29.99였던 어제와 30.00이 된 그날의 나는 정말이지 혼란스러웠다.       

  “너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야. 피부도 잘 챙겨야 해. 나중에 나이 들어 후회한다.

   선크림 하고 아이크림은 필수라고.”  

막 잠에서 깨, 동생이 군대에서 신던 초록색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담배를 사러 가면서도 고민은 깊어진다.

(로션도 잘 안 바르는데.. 아이크림이 필수라니!! 너무해!!)

우리는 30대 인간에게 사회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수많은 미디어와 인간관계를 통해 배워왔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30대의 지침서 따위는 받지 못했단 말이다!!      


 첫 30대를 살아보는 어른 아이의 패닉은 곧 나이듦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불안과 혼란의 카오스가 오직 나만 겪는 현상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세상에는 너무 멋진 30대들이 넘쳐난다. 

그에 비해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고, 아직도 모르는 것, 어설픈 것 투성이다. 

심지어 누군가 집에 어른 계시냐고 물으면 어색하게, “어.. 엄마 안 계시는데요”라고 답하는 어리숙한 나라는 사람이.. 온전한 사회인으로 기능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인간이 30대가 되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30대의 쓰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큰 폭풍을 몰고 왔다. 


 우선 나는 한 번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감격에 찬 얼굴로 모두에게 축복받으며 ‘버진로드’를  걷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비혼주의라고 굳이 나를 규정하지 않지만(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변명이다) 학생 신분이 지속되면서 나에게 이런 구체적인 상상은 사치에 가까웠다. 

  

결혼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여성으로서 나의 신체와 그 선택은?

적지 않은 나이의 신체를 가진 미혼 여성이자, 도태된 사회적 동물로서 나는 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꼬리를 무는 이후의 고민들은 한층 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미혼과 비혼은 적법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는 나의 자궁, 난자들에 대한 고민도 끊이지 않는다.

역시 냉동난자가 유일한 답인가? 오늘이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젊은 날이 아니던가? 그런데 내 난자를 어디에 쓸 것인가? 아니 나는 난자 보관비용이나 부담할 수 있나? 

    

그리고 이러한 고민에 난생처음 그리고 아주 ‘적나라한’ 선택지를 던지는 다큐를 보았다.      


그리하여, 


    “<박강아름 결혼하다(Areum Married)>(2021)”     


 우리 사회에 시의성 있는 화두를 던져온 박강아름은 그의 전작 <박강아름 가면무도회>를 통해 잘 알려진 감독이다. 전통적인 관습과 가치관을 대물림하는 가부장에 대한 전복과 투쟁, 정형화되고 규정적인 여성상과 ‘미’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점철된 감독의 세계관에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묘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결국 제도적 굴레 안으로 그 또한 편입하는 것인가! (물론, 필자는 결혼에 대해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처절하게 거대 담론에서 소외된 두 개인의 결혼 생활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하지만 한 없이 가까운 또 다른 개인의 탄생과 성장을 담아냈다. 

그리고 이 노골적인 연대기,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 그려지는 가장권의 전복,

여성 주도의 가모장(matriarchy)의 풍경을 보며 나름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한다고 자부하는 나의 편협함을 발견하곤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가계를 걱정하는 박강아름 감독의 우환과 '영수증' 그리고 그의 집사람이 누리는 3유로짜리(사실 박강아름 감독은 그 값의 절반도 안 되는 일반 커피를 마셨다. 이들의 참사랑은 영수증에서조차 드러나는가!!) 카페 프라페의 행복을 보며 내 안에는 분명 누군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게다가 나라는 인간은 ‘결혼’의 이미지를 곧장 ‘웨딩 세리머니’와 연결시키지 않았던가? 순백의 드레스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아, 몇 초 가량 박강아름 감독의 연주와 행복한 미소 그리고 새하얀 드레스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두 인간이 만나 한 집에서, 그것도 저 멀리 낯선 땅 프랑스에서 살아간다. 게다가 임신과 출산, 양육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박강아름 감독과 ‘집사람’. 이 두 사람은 나에게는 너무나 용감하고 무모했고 대단하고 절박했고 그리고... 투머치였다! 이 모든 상황이 한 씬에 들어와 있다니. 공포 그 자체였다.(물론 영화는 감독 특유의 유머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진짜 너무너무 앞 발을 꽉 깨물고 싶은 닥스훈트까지. 이것이야말로 30대 기혼자들의 진정한 카오스란 말인가!!?      

 

 아직까지는 여성의 신체로만 가능한 재생산의 기능을 수행하고 다시 바깥양반으로 돌아가는 박강아름 감독을 보며 나는 다시금 나의 신체와 생식 가능성을 가진 남은 난자들에 대해 생각했고 또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 새로운 선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감독이 몸이 좋지 않은 집사람을 끌고 덩케르크로 간 날은 바다를 보기에 그리 완벽한 날씨는 아니었다. 그러면 어떠한가? 낑낑거리며 유모차를 옮기는 바깥양반을 보며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집사람은 터벅터벅 돌아와 함께 둘 사이의 보리를 옮긴다. 여성과 남성 부인과 남편 바깥사람과 집사람. 이런 단어들로는 그들이 함께 걷는 그 길을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그들은 서로의 균형을 맞추며 나란히 걷고 있지 않은가?


영화가 끝나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집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의 스포를 막기 위해 영화에 대해서는 이쯤 이야기해야겠다.

(하지만 가수 이랑의 잔잔한 목소리가 그리 녹록지 않은 자신의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써 내려가는 박강아름 감독의 에세이를 더욱 진하게 만든다는 것과, 곳곳에 삽입된 스톱모션 이미지와 그의 ‘하이퍼 리얼’한 다큐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라는 정도는 공유해도 되겠지)     


* 해당 리뷰는 씨네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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