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PD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 프로덕션 PD를 원한 건 아니었다
방송 아카데미를 수료한 즈음에 우연히 독립 프로덕션의 채용 공고를 보았다. 한 방송사의 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덕션이었다. 나는 예능 PD 직군으로 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었기에 일단 원서를 내 보았는데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 2개 정도의 방을 쓰고 있던 작은 규모의 프로덕션이었다. 엄청 긴장한 채로 면접을 봤는데 내 어떤 면을 좋게 보았는지 바로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내가 들어간 프로덕션에서는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나는 책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팀에 투입되었다. 방송사 내부 팀과 우리 팀이 교대로 2주에 한 편을 제작하는 빠듯한 일정이었다. 메인 PD, 나, 외주 카메라 감독과 조감독 이렇게 4명 정도가 그때그때 팀으로 엮어 움직였는데, 하루아침에 '조연출'이라는 직급을 달게 된 나는 바로 제작에 투입되어 기획 회의, 장소와 출연자 섭외, 촬영과 편집, 정산까지 차고 넘치는 할 일을 떠맡았다. '열정 페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차비 정도만 받고 한 달에 열흘 정도는 집에 안 들어갔던 것 같다. 사무실 한편에 있던 이층 침대와 라꾸라꾸 침대는 이미 다른 선배 PD들이 편집하다 지쳐 쓰러져 있어서 책상 의자를 세 개 쪼르르 붙여놓고 자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나름 방송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빛나던 시절이었다. 뭐라도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나를 살아있게 했다. 촬영을 위해 주변 행인들을 통제하며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를 따기 위해 거리를 돌면서도 내가 방송을 만들고 있다는 뿌듯함에 어색함이나 창피함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은 극의 극의 극소수였지만 교양 프로그램이었기에 내 평생 만나보지도 못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발레리나 강수진, 재즈 보컬리스트 웅산,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 등을 내가 어디서 만나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8~9개월쯤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조금씩 내 안에 무엇인가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을 만들고 제작하는 피디지만 어디까지나 방송사의 눈치를 보고 검수를 받아야 하는 '을'의 입장이었고, 독립 PD라는 명함도 성에 차지 않았다. 능력만 있으면 어디서나 일을 받을 수 있지만 일이 없으면 그냥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는 프리랜서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속물 같지만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방송사에서 다른 친구들처럼 공채 전형을 당당히 통과해 PD라는 직함을 갖고 여의도를 활보하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공채 준비를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선배들은 굳이 왜 그 힘든 길을 다시 가냐며 여기서 차분히 경력을 쌓아 다른 기회를 노려보라고 했다. 충분히 능력이 있으니 금방 자리잡을 수 있을거라며 선배 피디는 방송 자막 '연출'란에 내 이름을 넣어주고 남들보다 빠른 입봉을 시켜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급했다. 나이는 자꾸 들어가고 있었고 여기저기 떠도는 프리랜서 피디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공채 시험을 보겠다며 다시 프로덕션을 나왔지만 그 해 시험의 결과는 처참했다.
다시 프로덕션으로 돌아갈 자신도 없고, 일반 사무직종에는 원서도 내 보지 못할 나이가 되어 버렸다. 친구들은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는 점점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더 지체했다가는 다시는 올라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워져 일반 회사 수십 군데에 원서를 냈지만 단 한 통의 서류 통과 연락을 받지 못했다. 꿈이고 뭐고 지치고 힘들었고 나는 그냥 안정적인 환경이 갖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꼬박꼬박 월급만 받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을까 싶어 밟았던 계단을 낭떠러지로 만든 건 나였지만 그런 건 생각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밑으로, 더 밑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가며 집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설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면피용으로 공무원 준비를 하겠다고 독서실로 숨어들기도 하고, 답답함에 뛰쳐나와 이곳저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27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예쁜 나이었는데 나에게는 부끄럽고 숨고만 싶었던 아픈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