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능 PD에 지원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좌표없이 항해하다 밤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by 샐빛

바야흐로 취업 시즌이 다가왔을 때, 대학원 진학을 하는 친구들과 대기업 취업 준비를 하는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나도 열심히 방송사에 입사 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조교 사건을 거치면서 라디오쪽으로 마음을 굳힌 나는 언젠가 진행도 하면서 프로그램도 만드는 PD가 되겠노라며 '라디오 PD' 직군에 원서를 넣었고, 도전 첫 해임에도 유일하게 한 방송사의 면접 전형까지 올라갔다. 청춘의 패기와 신입으로서의 열정보다는 탈락의 두려움과 합격에의 부담으로 잔뜩 쫄아든 채 치렀던 첫 번째 면접의 결과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탈 to the 락. 면접을 썩 잘 본 편이 아니어서 나올 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첫 면접의 불합격 결과를 받아드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라디오는 TV보다도 채용 인원이 현저히 적었고 채용을 하지 않는 방송사도 있었다. 라디오쪽으로만 한우물을 팠다가는 지원 기회조차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또다시 나를 집어 삼켰고, 채용 인원이 라디오보다는 많다는 이유로 그 다음 해 부터는 TV 제작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편성이나 스포츠는 전혀 모르겠고 드라마는 넘사벽 영역인데다 시사교양은 나에게는 없는 면모인거 같아 보고만 있어도 즐거운 예능 PD로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포장에 이끌린 채,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미련에 졸업을 하고 1년간 백수로 지내면서까지 나는 계속 공채 준비를 했다. 차라리 서류에서부터 광탈했다면 금방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보는 시험 족족 면접까지는 곧잘 합격하곤 했기에 싹수가 없는 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다는 심산으로 대전, 여수 등의 지방 방송사 시험에도 응시하며 새벽 기차를 타고 부지런히 돌아다닌 시절이었다. 첫 차를 타고 집을 나오며 나는 내가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왜 PD가 되고 싶은가'에 대한 철학이 없었다. 면접의 단골 질문이자 묻지 않아도 가슴속에 품고 있어야 할 대답이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한 번도 이 질문을 진지하게 묻고 그 답을 들어보지 않았다. 면접에서 대답해야 할 '답변'으로서만 이 질문을 계속 곱씹었고 보기 그럴듯한 답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어떤 면접에서 "왜 예능 PD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편집할 때 재밌을 것 같아서요."라는 개똥같은 대답을 하기도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 없는 비밀이지만 드디어 여기서 털어놓는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그때는 뭐라도 답변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미쳐 있었다).


좌표도 없이 항해를 하는 배가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리 만무했지만 그 때의 나는 여전히 내 문제가 뭔지 모르는 채 그저 관성대로 꾸역꾸역 노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합숙 면접까지 가서 떨어졌던 한 방송사의 면접관에게서 '실전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라는 피드백을 듣게 되었다. 깜깜했던 밤바다에 나타난 북극성처럼 길을 잃고 헤매던 나에게 새로운 좌표가 뜬 기분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산으로 무턱대고 제작 실무에 대해 배우기 위해 마포에 있던 한 방송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지금은 찾아 보기도 힘든 6mm 카메라를 들고 꼼지락 거리며 시간만 보냈던 세상 쓸데없었던 방송아카데미(이 곳에 대해서는 할만하않. 뭘 배웠는지도 뭘 가르쳐주기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막판엔 제대로 나가지도 않아서 수료장을 받아오지도 못했다. 아, 돈 아까워)에서의 6개월은 이력서에 써 넣을 '방송아카데미 TV제작 과정 수료'라는 한 줄로 남았지만 그 한 줄을 디딤돌 삼아 여의도의 작은 프로덕션에 발을 내딛었다.



이미 출발부터가 어긋나 있었는데, 젊은 날의 나는 왜 그걸 알지 못했을까. 꿈이라는 허상을 쫓으며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스스로에게 취해있었던 것 같다. 취업을 마친 친구들 사이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네가 대단하다는 응원 속에 어쩌면 내 꿈은 이게 아닌 것 같다고 인정하기가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같은 길을 준비하던 친구들의 연이은 합격 소식, 이미 직장인이 되어 다른 길로 떠나고 있는 동기들을 보며 이게 아니면 뭘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를 둘러싼 두려움이라도 붙들 어야만 했던 고단한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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