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꿈이라고 말해보지도 못했다
텔레비전 만큼이나 내 유년시절의 단짝은 라디오였다. 그 시절에는 5시 이전에는 방송을 하지 않았기에 맞벌이를 하시던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시기 전까지 학원에 가고 없는 언니를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혼자 라디오를 틀어놓고 놀다 지쳐 잠드는 것뿐이었다. 칼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소파 아래(정확히 소파와 테이블 사이의 구석)에 잠이 들어있는 내가 그렇게 불쌍했다고, 일흔을 넘긴 아버지는 아직도 말씀하신다.
라디오 키드 시절을 보냈기에 학창 시절에는 학교 방송국에 들어가고 싶었다. 점심시간에 노래를 틀고 사연을 읽어주며 각종 학교 행사에 차출되느라 공공연하게 수업을 빼먹을 수 있는 학교 방송국은 내게 동경의 장소였다. 하지만 중학교 때에는 시험에서 떨어졌고, 고등학교 때에는 부모님의 반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먼저 학교 방송국에 들어갔던 언니가 바람이 들 대로 들어서 부모님의 애간장을 녹여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대학 방송국에 들어가 보는 것이 새내기 때의 유일한 바람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이었다. 으레 그렇듯 이제 막 성인이 된 신입생들에게 선배들은 생명수라도 되는 듯 밤마다 술을 따라 주었고 잘 버티던 나는 마지막 날 무너지고 말았다. 특히 학교 방송국 부장을 맡고 있던 선배와 붙어서 엄청난 술주정을 해댄 모양인데(화장실 수건걸이를 뽑아 버렸다는 말도 있는데 나는 전혀 모르겠다) 아마 학교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필름이 완전히 지워져서 그날 밤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들로 미루어 볼 때 단 한 장면이라도 기억이 났다면 이불을 넘어 천장을 뚫고 하늘까지 하이킥을 하느라 학교를 그만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방송국에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던 선배의 말을 전해 듣고서도 학교 방송국에 지원서를 낼 용기는 없었다. 학교 방송국 출신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인맥이나 경험들이 나중에 방송국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아쉬웠지만 그냥 그렇게 학교 방송국에 일원이 될 기회를 날려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의 꿈은 변하지 않아서, 취업을 위해 다들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선택했을 때에도 꿋꿋이 신문방송학을 선택했고, 친구들이 취업 설명회를 들으러 다닐 때에도 방송국 취업을 위해 학교의 언론고시반에 들어갔으며, 각종 스터디에도 열심히 참여하며 나름대로의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송 아카데미에서 모교 학생들을 조교로 뽑아 수업료를 면제해 주고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기회가 생겼다. 너무 좋은 기회였기에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했는데 그중에는 나와 함께 신문방송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라디오 제작 수업을 들었던 친구도 있었다. 그 시기에는 TV 제작보다는 라디오 제작에 마음이 끌리던 때라 아카데미의 '라디오 제작'과정에 지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내가 지원한 과정은 '쇼호스트 과정'이었다. 쇼호스트 과정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쇼호스트를 비하하는 발언은 절대 아니고,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과정에 터무니없이 지원을 했기 때문임을 강력하게 밝힙니다).
라디오 제작 과정에 친구가 같이 지원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친구와 같이 경쟁을 하기가 괜히 어색하고 미안했다.(아니, 도대체 왜? 그 친구는 전혀 그럴 마음도 생각도 없었을 텐데?) 같이 면접을 보다 한 명이 붙고 다른 한 명이 떨어지면 내가 그 누가 되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둘 다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았던 거지?)
아무도 관심 없는 이런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진짜 하고 싶은 과정에는 지원도 해보지 못한 채, 그래도 좋은 기회 자체를 날려버리기가 아쉬워 다른 과정은 뭐가 있나 살펴보다가 아나운서 과정과 쇼호스트 과정이 눈에 띄었다. 학교에서 라디오 제작 수업을 들었을 때 조별 과제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했었는데, 그때 DJ를 맡아 라디오 부스 안에서 진행하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었던 기억이 났다. 다른 조원들도 정말 잘한다고, 이 일에 대해 앞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칭찬을 해 주었을 정도였다(물론 수업 결과도 A+이었다).
제작에만 관심을 갖다 진행자의 매력을 조금 맛본 후, 사실 DJ에 대한 꿈이 조금씩 생겼다. 대부분의 라디오 DJ는 유명 연예인이나 아나운서가 맡고 있어서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누구에게도 라디오 DJ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는 꺼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나운서 과정에는 더더욱 지원하기가 부끄러웠다. 누가 봐도 예쁘고 우아한 친구들이 지원한다는 아나운서 과정에 지원했다가 '네가 아나운서가 되겠다고?'라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뜬금없이 쇼호스트 과정에 지원을 해 버린 거다. 어차피 말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말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쇼호스트 과정의 면접을 보면서 뉴스 기사를 읽는 발성이 좋다고 아나운서 과정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냐는 제안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회를 두 손뿐 아니라 두 발로 붙들고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가능성이 조그만 새싹을 틔울 수 있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내 입에서는 내 머리에서 하는 생각과 아주 다르게 "괜찮습니다.!" 라는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놀라고 당황한 짧은 순간에도 줏대 없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내가 지원한 과정에서조차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불합격이었다. 내가 걱정하고 배려하느라 지원도 하지 않았던 라디오 제작 과정은 내 친구가 붙었고(그 이후 그 친구는 아카데미 경력을 살려 라디오 쪽 인턴도 해보고 작가 일도 해보고 이래저래 도움을 받았다) 수줍어서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아나운서 과정은 제안을 받고도 날려버린. 그야말로 답이 없었던 방송 아카데미 조교 도전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그때, 라디오 제작 과정에 지원을 했더라면, 조금 용기를 내어 아나운서 과정에라도 지원을 했더라면, 아니 면접관의 제안을 붙들어라도 봤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의 날개를 펼쳐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삽질도 이런 삽질이 있나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주변의 시선과 쓸데없는 체면 따위 뭐가 그렇게 중요했을까. 그땐 정말 찬란하도록 젊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