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결혼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데

아이가 생겼다

by 샐빛

서른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가 되면서, 새로운 내일을 꿈꾸는 것은 사치같았다. 커다란 조직 안에서 모두와 함께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다보니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인 것도 같았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것이 불행인 것인지 다행인 것인지 매일 헷갈렸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서른 중반의 싱글 여자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결혼에 대한 압박도 그러했다. 처음엔 생각이 없다고 버텼지만 그럴수록 길어지는 입씨름이 지겨워 나는 전략을 바꿨다. 소개해 주는 모든 사람을 만나겠다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연애도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반색을 하며 여기저기서 박씨를 물어다 준 제비처럼 소개남들을 물어왔다.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을 만났고 예쁜 척, 조신한 척, 마음에 들지만 안 드는 척 같은 쓸데없는 신경의 낭비를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지만.


그러다가 우연히,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엄마가 소개한 자리였다. 특별한 관심이 없어서 조건이고 뭐고 제대로 묻지도, 듣지도 않았고 그냥 괜찮으면 연애나 하고 아님 말고의 심정으로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였고 제법 나누는 얘기도 재미있었다. 말이 너무 잘 통하는 것도 그렇다고 안 통하는 것도 아닌,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대충 들었던 조건은 거짓이었다.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기 보다는 주선자가 정보를 잘못 알고 있었다. 처음엔 내가 흔히 보아왔던 환경과는 익히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어서 당황했지만 사람 자체가 괜찮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연애할 때 그런 것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어렸을 땐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웠지만 이 나이에 뭐 한 명이라도 더 만나면 좋지 싶은 마음이었다. 속된 말로 '아끼면 똥 된다'고, 오랜 기간 동안 꼭꼭 닫아왔던 마음을 연 만큼 몸도 열렸던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지만.


만난 지 오래 되지 않은 시점에 아이가 생긴 걸 알게 된 건 정말 크나큰 충격이었다. 일단, 내 주변에는 난임, 불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임신이라는 것이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에 그 어려운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나는 '유교걸'까지는 아니지만 혼전임신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아닐 뿐더러 그 동안은 그런 가능성이 있는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다. 부모님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나를 바라볼 주변의 시선이 무서웠고, 아니 그런 것보다 이런 일이 현실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경험이 없었고 지식이 없었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생각했고, 출산과 육아는 헬 오브 헬임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을 배제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단 한번의 실수가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줄은 꿈에서조차 몰랐다. 눈 앞이 캄캄해졌지만 눈을 계속 감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떠야 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을 책임져야 했다.


책임지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부터, 모든 사람이 복잡해지는 방법을 두고 고민의 고민을 계속했지만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털어놓았고, 그는 다행히(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청혼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은 예상가능한 수순으로 흘러갔다. 가족들에게 알렸고, 유교맨인 아버지는 며칠을 잠 못 드셨고, 친척들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랐다며 수군거렸다(나는 그동안 다른 친척들과 약간의 담을 쌓고 지내는 아웃사이더였다). 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이 땅의 수많은 예비 신부들처럼 결혼준비를 진행시켰다. 회사 일과 결혼 준비를 병행하면서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새롭게 내 앞에 던져진 퀘스트를 미션 클리어 하는 마음이었달까. 임신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결혼식을 올렸고 축하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인사 속에서 각종 행사들을 마쳤다.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숨길 수도 없는 일이라 금방 티가 나기 시작한 배를 부여잡고 출산 한 달 전까지 열심히, 회사에 나갔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인 선택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물론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가할 시간도 부족했고, 임신과 결혼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충분한 계획이나 철학도 없이 그야말로 저질러놓고 본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늘 복잡하고 생각이 많았는데 그때처럼 단순했던 적은 또 없었지 싶다. 회사 생활에 지쳐있었고,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웠고, 심심하고 무료한 날들을 벗어나고도 싶었고, 이미 친구들은 모두 결혼한 상황에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쏘냐 하는 심보도 있었고, 그때는 남편과 노는 게 제일 재미있었으니까.


이런 저런 핑계를 또 한번 방패삼아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천천히 결혼이라는 문을 열고 육아라는 지옥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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