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귀 7개월 만에 두 손 들고 전업맘이 되었다
느닷없는 결혼과 임신으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당황했겠지만 나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임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지 인정하고 그 뒤에 올 많은 일들을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나니, 원래부터 모성애가 충만한 사람인 것처럼 커피와 라면, 탄산음료를 끊었고 그 당시 내가 애정 하던 배우 이민호를 매일같이 떠올리며 태교 코스프레를 했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며 가끔씩 뭔가가 꿈틀거릴 때에는 이 안에 에일리언이 있,,,아니 아기가 있다는 것이 실감 났지만 당장 마감이 다가오고 있던 책을 만드느라 배만 쳐다볼 여유가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 상황이 달라졌다고 내가 처한 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는 여전했고 무거워진 몸만큼이나 느껴지는 부담감은 더했다. 결국 만들고 있던 책의 마감 시점을 맞추어 출산예정일로부터 한 달 전부터 출산휴가를 썼다.
여성 인력이 월등히 많은 회사인 만큼 출산휴가나 육아 휴직을 쓰는 것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지만 내가 없는 자리를 남은 팀원들이 메워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다 힘에 부치면 새 인력을 들일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원래의 팀으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반드시 이 팀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산 휴가 3개월에 육아 휴직 10개월을 신청했다. 사실 육아휴직도 12개월 꽉 채우고 싶었지만 내가 복귀할 시점이 한창 바쁠 시점이라 나도 적응하기 어렵고 팀원들도 신경 쓰기 어려울 것 같아 2개월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휴가를 마치면 다시 직장인의 생활로 돌아올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꿋꿋하게 회사를 다닐 생각이었다.
출산을 기다리는 한 달 동안은 다시 올 수 없는 평안한 시간이었다. 임신을 한 걸 알아챈 게 신기할 정도로 임신 기간 내내 입덧도 없고 냄새에 민감하지도 않아서 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었고 한밤중에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음식을 사 오라며 남편을 괴롭히는 일도 없었기에 출산만 잘 하면 될 것 같았다. 아이를 낳는 일을 생각하면 두려웠지만 남들이 다 하는 일이니 나도 별 일이 없다면 자연분만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예정일을 앞두고 갑자기 양수가 터졌고 뱃속 아이가 태변을 먹으면서 응급 수술을 하는 바람에 진통의 그림자도 느껴보지 못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을 1~10의 순서로 등수를 매긴다면 아이를 낳는 고통이 제1이라던데, 나는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날까지 단 1의 고통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병원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아이는 내 옆에 누워있었다. 내 옆에 누워있는 이건 뭘까,라고 잠시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가 태어나고, 다른 생각을 할 시간도 없이 1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육아의 괴로움과 외로움, 힘듦을 느끼고 탓할 시간도 없이 복직의 시간은 다가왔고, 나는 당연하게 복직 준비를 했다. 인생 계획에 없던 임신과 출산이었기에 나의 정체성은 아직 '엄마', '주부'는 아니었다. 돌쟁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면서도 아이를 두고 어떻게 회사에 나가지, 따위의 고민은 하지 않았다. 나가야만 했고 나갈 것이었다. 고민은 필요 없었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에 맞추어 복직했다. 하지만 엄마가 되어 출근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집에서 먼 거리의 회사를 다니던 남편은 평일에는 아이의 등하원과 육아를 나눠해 줄 수 없었다. 유아식을 시작한 아이의 아침 도시락과 함께 어린이집의 문이 열리는 시간에 아이를 맡기고 문이 닫히기 전에 아이를 데려와야 하는 미션을 나는 매일같이 혼자서 수행했다.
회사가 8시 반 출근, 5시 반 퇴근이었지만 퇴근 길이 너무 막혀서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6시 반이 넘었다. 이미 불을 다 끄고 부엌에만 불을 켜 둔 어두운 어린이집에는 퇴근할 준비를 다 마친 선생님이 아이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매일같이 죄송하다는 인사와 함께 아이를 안아 집으로 가면 나는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놀아줘야 했다. 배고프고 힘든 날에는 잘 먹지 않고 칭얼대는 아이에게 한껏 짜증을 내며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는 데리러 온 나를 보면 뒷걸음질을 쳤다. 내 눈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고 아이를 달래고 눈을 맞추려면 한참을 아이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애정을 갈구해야 했다. 육아에 대해, 아이의 심리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아이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잘 돌보아주지 않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나에게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하필 그즈음, 우리 팀에 유일한 기혼자이며 바쁜 남편을 대신해 독박 육아를 하던 A가 자신의 아이가 심리치료를 받고 있음을 털어놓았다. 육아도 살림도 일도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고백은 나를 흔들었다. 나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이상하게도 내 인생은 내가 잠시 흔들리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고민이 시작될 무렵 남편은 이직 제안을 받았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과 회사에서는 남편이 절대로 출퇴근할 수 없는 지역에 있는 회사였다. 남편을 따라 회사를 그만두고 이사를 갈 것인지, 조금 더 버텨볼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결과는 나와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평일 독박 육아에 이미 지치고 있었고 남편은 나의 퇴사를 말리지 않았으니까.
아주 오래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고작 7개월 남짓의 워킹맘의 삶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이어질 남은 7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미 십여년 째 친정 엄마의 손을 빌어 워킹맘의 삶을 처절하게 살고 있는 언니가 아니더라도 내 모습이 어떨지 그려볼 수 있었다. 도우미를 쓸 자신도, 엄마의 손을 빌릴 수도 없는 나는 빠르게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엄마, 전업주부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기로 했다. 그 옷은 영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처절하게 버텨온 내 이름은 사회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는, ㅇㅇ이의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