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엄마라는 이름이 무거울 줄은 알았지만

나는 지금 간신히 버티고 있다

by 샐빛

퇴사를 하고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변두리 지역의 신도시로 이사를 왔다. 내가 이사를 왔을 무렵에는 입주하기로 한 아파트 외에 다른 건물은 모조리 공사 중이었다. 헛헛한 마음만큼이나 황량한 주변 환경이 어찌나 찰떡같던지. 나는 버스를 한 번 타려면 30분씩 기다려야 하는 경험을 평생에 처음 해 봤다.


근처에는 아직 어린이집도 없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낸 것도 미안하고 그동안 떨어져 지낸 시간을 벌충한다는 마음으로 가정 보육을 시작했다. 이사한다고 했을 때,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이 이사 갈 집보다 근처 어린이집에 먼저 등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던 말들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하지만 아이랑 집에서 보낸 8개월 동안 나는 내 밑바닥을 보았고 서로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육아와 살림은 정말로 내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니었다.


육아와 살림이 적성에 맞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나는 아이가 커 가는 모습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가 커가는 만큼, 아이가 움직이는 만큼, 아이가 사고 치는 만큼, 아이가 말을 안 듣는 만큼 나는 화가 났고, 소리를 질렀으며, 우울과 짜증이 늘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어서 힘들었다.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하소연할 기운도 없었다. 나 자신이 못나 보이고 이렇게 아이랑 같이 있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 그냥 회사나 다닐걸, 다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게다가 남편은 때때로 출장을 갔다. 지방에 사나흘씩 가는 건 예사였고,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일주일 정도 베트남으로 출장을 갔다. 아이의 두 돌 생일에는 한 달짜리 해외 출장을 가느라 함께 촛불을 불지 못했고 4살 때는 3달짜리 해외 출장을 떠난 남편을 빼고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아이와 단 둘이 보내기도 했다.


처음엔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힘이 들었다. 남편이 육아와 살림에 크게 도움이 되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없다는 것 자체, 뭐든지 내가 혼자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주변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마트 하나가 없고, 아이가 아플 때는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야 하는 환경 속에서 남편이 없다는 것 자체는 나에게 스트레스였다. 그런 만큼 남편에게 의지하고 의존해야 하는 삶이 짜증이 났다. 경제력을 잃은 것도 서글픈데 기동력마저 없으니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구원해주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움직이기로 했다.


먼저, 아이를 다시 아파트 단지 내에 새로 개원한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리고 운전연수를 시작했다. 다행히 시부모님께서 당신들이 끌고 다니던 경차를 나에게 주시기로 했다. 천하에 쫄보라 운전은 정말 무서웠지만 언제 어디서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능력이었기에 다시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다음엔 외주 일을 맡았다. 예전 회사에서 알고 지내던 후배가 회사를 옮기면서 나에게 연락을 주었다. 크게 애정을 갖던 일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로는 교정 업무만 한 것이 없었다.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은 돈이었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후 나 역시 집에서 '놀지 않는다!'를 온몸으로 증명할 수 있어 기뻤다.


그리고 틈틈이 독서 모임에 나갔다. 모르는 사람들과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된 내 첫 번째 독서 모임은 황폐해진 내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낮시간에 하는 모임이라 대부분이 또래를 키우고 있는 엄마들이어서 우리는 늘, 마지막 1초까지 할 말이 많았다. 유아어를 사용하는 아이가 아닌 성인 어른들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살림, 남편, 시댁, 육아가 아니라 사회에 대해, 문학에 대해 우리는 열심히 이야기했다.


물론 행복했던 시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느끼는 순간은 찰나이고, 현실은 너무나 길었다. 예상치 못한 임신과 결혼, 눈 깜짝할 사이 태어난 아이를 키워내기 위해 매일매일 나는 새로운 정보를 알아야 했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었으니까. 아이가 커가는 만큼 새롭게 알아나가야 했고 배워나가야 했다. 회사에서는 승진을 하면 그 직위에 맞춰 교육을 시켜주는데 아이가 분유에서 이유식을 먹게 될 때, 유치원에서 학교에 가게 될 때 엄마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걸 알아내서 숙지하고 체득하는 것은 아직은 '엄마'만의 일이다.


때때로 이런 지난한 과정이 너무나도 귀찮고 버겁고 억울해서 남편에게 기계적인 분담을 요구하기도 하고,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하기도 해 보지만 '보통'의 '평범'한 남자인 남편은 그저 들어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르는 척한다. 한 순간 지나갈 폭풍인 것처럼 구는 상대를 볼 때, 어디 까지 치고 들어가야 하는가 전의를 상실할 때가 많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분열의 과정을 겪고 있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회로 다시 돌아갈 길은 현실적으로 요원해진 것 같으니 남편이 벌어 온 돈으로 열심히 살림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 만족감을 느껴볼까 싶다가도, 모든 것이 변해버린 나와는 달리 여전히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남편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미니까. 네가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 선택지를 강요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억울한 마음에 참을 수가 없으니까. 아직은 뭐가 맞는 건지, 맞는 게 있기는 하는 건지 그래서 처절히 싸워 나갈 건지, 현실과 타협할 것인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아직도 아리송하다.


갑을병정쯤 되는 위치에 있는 외주 작업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있고, 독서 모임은 엄마들의 사정으로 흐지부지 되었으며, 코로나가 터지면서 아이랑 집에만 있다 보니 장거리 운전은 여전히 겁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생활 속에 다시 아무것도 아닌 삶으로 가라앉는 것 같아 나는 지금 발버둥을 치고 있다. 이제는 도망갈 곳도 떠나갈 곳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왕관의 무게가 나에게는 너무나 무겁지만 내가 내려놓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니 일단은 하루만 더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붙잡아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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