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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영낭자 Dec 23. 2015

동짓날, 잊고 있던 맛

오늘도, 고마워요


"팥죽 한 그릇 하러 오세요."

지인의 저녁 초대를 받기 전까지 난 어제가 동짓날 인지도 몰랐다. 

팥죽 소리를 듣는 순간, 입에 침이 고인다. 

좋아하지만 손이 많이 가서 선뜻 해 먹기 어려운 팥죽을 공짜로 와서 먹으라니...!

주부가 되고 난 후엔 누가 내게 한 끼를 대접해준다는 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저녁 6시 30분. 들뜬 마음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큼지막한 압력솥에 정성껏 끓인 팥죽과 맑은 동치미 국물, 찐 고구마, 귤, 포도즙까지... 

정성으로 차린 저녁 밥상이 황송하다. 



후후~ 뜨거운 팥죽을 식혀서 아이에게 먼저 준다. 

팥죽을 처음 보는 우리 아들, 표정을 보니 얼른 먹고 싶어 하는 눈치다. 

어릴 때 엄마가 해주시던 것처럼 설탕을 조금 넣어서 휘휘 저어준다. 

달큰한 팥죽이 입맛에 맞았는지 녀석이 한 그릇을 금세 해치운다. 

옆에 놓인 동치미 국물도 후루룩~ 아예 그릇째 들고 마신다. 


녀석이 먹는 걸 보니 나도 얼른 먹고 싶어진다. 동치미 국물부터 한 입 뜬다. 

무가 동동 띄워진 동치미는 적당히 짭쪼름하면서도 시원하고 

어느 시골집의 장독대에서 갓 퍼온 것처럼  깊은 맛이 났다. 

와, 이렇게 맛있는 동치미는 정말 오랜만인데..!

알고 보니 김포 통진읍에 사시는 여든 넘으신 할머니의 솜씨라고 했다. 

어쩐지...! 우리 할머니도 동치미 하나는 일품이셨는데... 


어릴 적, 시골에서 겨울마다 할머니가 보내주셨던 동치미가 생각난다. 

갓을 띄워서 은은한 연보랏빛으로 빛나던 할머니의 동치미는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그 어떤 동치미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일품이다.  

큼지막한 장독대에 담겨, 바가지로 얼음을 깨야 꺼내먹을 수 있었던 그 달큰하면서도 깊은 맛!

그 맛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할머니의 동치미... 내 아이에게도 그 맛을 보여줄 수 있다면! 


팥죽 한 그릇과 동치미를 떠먹으면서 

까맣게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할머니의 동치미를 추억한다.

내 아들 녀석도 태어나 이렇게 맛있는 팥죽과 동치미는 처음이겠지.

고마운 동짓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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