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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영낭자 May 08. 2019

육퇴 후 가출한 주부의 일기

공간을 정리하는 것은 삶을 정리하는 것과 같다

아침 8시, 정운이가 깨면서부터 시작된 나의 일과는 자정을 지나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끝으로 얼추 마무리됐다.

16시간 넘도록 끝없이 반복된 가사와 육아. 

며칠 전에 배달 온 소설책은 택배를 뜯지도 못한 채 방치돼 있고,

오늘도 책 한 줄 읽지 못하고 이렇게 하루가 저물어가는가 싶어 한숨만 나온다. 

이렇게 지낸 지 꽤 됐다. 남편은 매일 외근으로 바빠 마주 앉아 밥 한 끼 할 여유도 없다. 

자연스레 내가 독박 육아와 살림을 하게 됐는데 

요새 말로 육퇴(육아 퇴근) 후 가출(가사 출근)의 무한반복이다. 


오늘은 손가락 끝이 거칠거칠하고 물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리는 것이 주부습진에 걸렸지 싶다. 

왼손 엄지손가락은 칼질하다 베어서 아프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어제 뭣 때문에 베었는지 아프긴 한데 

손에 물 마를 틈이 없어서 잘 낫지 않는다. 

주부습진이 이리도 성가신 거구나...

예전에 남편이 나보다 살림을 더 많이 하던 시절, 손가락에 주부습진 왔다고 하소연할 때는

농담처럼 웃어넘겼는데 당사자가 되어보니 심각하다. 


(이 와중에 화장실에 정운이 똥기저귀를 안 치우고 그냥 나온 게 생각나서

잠시 화장실 가서 똥기저귀 치우고 나와 다시 글을 쓴다.)


살림이란 게 끝도 없이 반복되는 일이면서 나에게 기쁨이나 성취감, 경제적인 이득 같은 걸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보니 여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뺏기고 싶지 않다는 본능적인 방어 의식이 생기는데,

최소한의 신경과 관리만으로 집안을 깔끔하게 건사할 수 있으려면

역시나 정리라는 게 필수일 수밖에 없더라...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우리집  공간들

 

식탁에 앉아 거실이고 주방이고 둘러보면 아직도 정리해야 것들이 쌔고 쌨다.

개지 않은 이불과 장난감이 뒤엉킨 침실, 너저분한 화장대와 책상은 기본 옵션이요

매일 버려야 하는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며

빨래통에 쌓인 빨래하기, 행주 삶기, 장난감 닦기, 옷장 정리, 잡스러운 짐들 정리... 

하루 종일 치우고 정리하는 데만 온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어느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고, 

그 자체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가중된다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체감할 수 있었다. 


알파룸을 희운이 놀이공간으로 꾸며준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실천하기까지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곳에 방치돼 있던 너저분한 책상과 의자, 온갖 잡스러운 짐들을 보면 늘 한숨이 나오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면서도 금방 치우지 못했던 건 또 그 몹쓸 '미련'때문이었다. 

온갖 짐을 올려두는 용도로 변질된 책상임에도 '언젠가는 다시 쓰겠지' 하는 막연한 심리,

'저 의자를 그냥 버리지 말고 다만 얼마라도 받고 팔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본전 심리가 또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참 웃긴 게, 막상 말끔하게 비워진 공간을 보니 언제 그 공간을 차지하던 물건에 미련을 가졌냐는 듯 사라진 물건 따위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공간에 구상한 대로 놀이매트를 깔고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벽 트리와 전구를 달아 

밋밋한 벽을 꾸며주고 나니 아이가 너무 좋아한다. 


이 많은 옷 중에 지난 겨울 한 번이라도 입었던 옷은 얼마나 될까?


계절이 바뀌어 무거운 겨울옷을 넣어두고 가벼운 옷을 꺼내려 옷장을 정리하는데 

내가 지난겨울에 한 번이라도 입었던 옷들만 추려보니 겨우 한 바구니 정도밖에 안 되는 거다. 

나머지 두 바구니는 아예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들. 

그러니 내가 갖고 있는 옷의 2/3 이상은 잘 입지 않는 옷들인 거다. 

살 빠지면 언젠가 입어야지 하고 쟁여둔 옷들도 다 소용없는 게 내 취향이 바뀌더라. 

예전엔 좋아했던 옷들도 이제는 별로인 것들이 많다. 

그러니 '언젠가 입어야지'하고 옷을 꾸역꾸역 쟁여두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이제 알겠다. 


알파룸을 아이 놀이터로 바꾸고 옷장을 비워내며 깨달은 사실. 


결국, 공간을 정리한다는 건 삶을 정리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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