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대릉원과 바로 이웃한 첨성대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신발이 축축이 젖어온다. 양말 속 젖은 발가락들이 질색하는 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첨성대는 봐야지!
군데군데 포진한 물 웅덩이들을 피해 가며 도착한 곳.
비를 머금고 잔뜩 흐려진 회색 하늘과 비에 젖어 색이 더 짙어진 땅. 그 무채색 풍경 속에 더 깊은 무게감을 내뿜으며 회갈색 첨성대가 서 있다.
사진으로 보았던 날씬한 호리병 느낌의 첨성대는 어디 갔을까?
'난쟁이 마을 작은 집의 굴뚝으로 올리면 좋겠다.' 생각했던 그 첨성대는 어디 갔을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 안에 첨성대는 아주 작고 소박했다.
사진 밑에 소개된 실제 사이즈 따윈 아랑곳없이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본 첨성대는 내 의식의 밑바닥이 만들어 낸 크기 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천문을 관찰했다고 보기엔 높이가 낮다."
어딘가에서 들은 한 마디가 내 안에 집을 지은 탓이다.
그 선입견 때문일까.
오늘 마주한 첨성대는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날씬한 호리병? 난쟁이 마을의 굴뚝?
아니. 첨성대는 철갑기병이다. 장수부터 말까지 온몸을 철갑으로 두르고 전장을 누빈 개마무사다.
생각보다 육중하고 거대하다. 군데군데 하얗게 색이 바랜 돌 사이에 푸른 이끼가 진초록으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그리고 돌 틈사이 세월이 쌓아 올린 검은 때가 돌 하나하나에 또렷한 존재감을 선사한다.
홀린 듯 바라보다가 문득 농경사회였던 신라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첨성대와 그 첨성대를 만들고 관리하는 나라님들은 얼마나 존경스러웠을까 싶다.
실제 첨성대의 역할이 무엇이었든 왕실입장에서 첨성대는 여러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효자였을 것 같다.
당시엔 효자였고 지금은 먼 과거를 반추해 보는 역사적 유물이 되어 서있는 첨성대.
경주라는 이상한 나라의 두 번째 발걸음에서 철갑기병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호리병? 아냐!
굴뚝? 아니라고!
나는 이런 첨성대야!
육중하고 거대하게 온몸으로 부딪혀오는 첨성대와 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