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
경주 최부잣집 대문을 넘는다.
맑은 날이었다면 고운 흙이 깔린 마당을 자박자박 걸어보았을 텐데 비는 운신의 폭을 좁게 한다.
대신 비 오는 날에 밟으라고 안내되어 있는 바닥돌을 따라 징검다리 건너듯 마당을 건넌다. 건너서 도착한 처마아래,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다.
바로 최부잣집 육훈(여섯 가지 행동지침)이다. 가만히 서서 육훈을 정독해 본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400년 가까이 경주 최고 부자로 이름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보이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부자이면서 그 '부'를 긴 시간 동안 가능하게 한 정갈하고 꼿꼿한 정신이 빛나는 부자.
육훈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비를 그을 수 있는 처마 아래를 구불구불 돌아가며 천천히 걷는다. 그러다 대청마루 귀퉁이에 앉아 그림처럼 정갈한 중정을 바라본다.
빗줄기 사이로 최부잣집 일상이 눈에 그려지는 듯하다.
중정 앞을 하인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육훈 아래 놓인 쌀통에서 쌀 한 줌 꺼내어 찾아온 과객을 안내해 간다. 무명옷 입은 어린 며느리는 종종걸음으로 안채로 향하고 과객으로 넘쳐나는 사랑채에선 나랏일을 걱정했겠지?
주변을 구휼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부자라서 쉽게 나눌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부자라서 더 어려울 수 있는 게 나눔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부자들이 칭송받고 회자되는 것은 그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발걸음을 이끌고 많은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최부잣집의 진정한 재산은 대를 이어 내려온 육훈에 담긴 '정신' 아닐까.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내가 사는 마을엔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그 형제들' 중에 한 명인 '이석영'선생을 기리는 도서관이 있다.
그 도서관 앞엔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급히 처분해(이때 처분한 토지가 현재 가치로 2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6형제와 가족, 해방시켰던 노비들까지 모두 함께 만주로 향하는 그 춥고 서러운, 하지만 결기 가득한 기나긴 행렬이 그려져 있다.
가끔. 아니, 볼 때마다 울컥하는 그 그림이 지금 이 순간 떠오른다.
경주 최부잣집. 이회영과 형제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있는 수많은 최부자와 이회영들을 떠올리며.
경주라는 이상한 나라에서 코끝 찡해지고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빛나는 정신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