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장소와 시간의 맛
장 : '장'하면 장칼국수다. 특히 이렇게 추울 때는 더더욱.
외출했다 돌아와 추위에 곱아든 손가락을 주무르며 냉장고 속 장을 주섬주섬 꺼낸다.
고추장. 된장.
오늘은 뜨거운 김 폴폴 오르는 장칼국수를 끓여야겠다.
칼 : 칼국수는 아직 끓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장칼국수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걸쭉하고 진한 새빨간 국물 속에 기다랗고 탱글한 면발이 다소곳이 웅크려있다가 새침하게 눈을 맞춘다.
그 눈 맞춤이 만족스러워 군침을 꿀꺽 삼키면,
흐물거리지 않게 적당하게 익은 애호박과 잘 풀어져 노르스름한 몸체를 둥둥 띄우고 있는 달걀이 소리 높여 외친다.
'우리도 있어!'
아, 그래. 맞다. 너희도 있었지.
국물맛을 완성하는데 일조했을 애호박과 달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젓가락을 집어 들면,
그릇 한가운데 소복하게 올라가 있던 김가루가 젓가락을 끌어당긴다.
'나를 먼저 골고루 풀어줘야 완성되는 거라고!'
아, 그래. 맞다. 섞어줘야지.
깜빡 잊은 미안함을 담아 김가루를 골고루 풀어준다.
걸쭉한 국물에 짭조름한 맛이 더해져 꿈속에서도 가끔 나오는 추억의 장칼국수가 완성됐다.
국 : 국수를 크게 집어 후루룩 소리도 맛있게 빨아 당긴다.
한 입에 정겨운 칼국숫집 간판이 지나가고, 후루룩 두 입에 익숙한 거리가 스쳐간다.
입 안 가득 찬 면발을 꼭꼭 씹으면 함께 했던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고, 숟가락 듬뿍 뜬 붉은 국물은 주고받았던 마음을 담아 찰랑거린다.
칼국수와 함께 했던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음미하면, 얼어붙었던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기가 점점이 퍼져나간다.
수 : 수없이 많이 먹었던 그 맛을 똑같이 재현해 낼 수 있을까?
아니, 아마도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된장, 고추장 뚜껑을 열고 장을 듬뿍 덜어낸다.
부족한 맛은 내 안에 있는 사람과 장소와 시간들로 채워내면 되니까.
국물이 끓어오르고 폴폴 오르는 뜨거운 김 사이로 나는 친정집 근처 어느 장칼국수 맛집을 기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