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과 걸음들이 연결되어 있다.

by 글희

“우리 세 번 더 만나보자. 그리고 결단을 내리자.”

마지막 만남을 앞두고 있었다. 난 많이 단단해졌어. 내 세계를 잃지 않을 테야.

봄방학이 되자마자 기차표를 끊었다. 기차로 출근하시는 아부지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 아침 6시. 새벽녘도 아닌 밤 같은 겨울을 뚫고 아부지와 기차역으로 향했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 따뜻하게 입는다고 입었는데 냉기는 패딩과 맨투맨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머무른다. 내일 나는 우리의 만남을 마무른다. 그전에 모든 생각을 곱씹고 정리하고 싶었다.

우리 마음은 어떻게 흘러갈까? 보통의 연인의 시작과 달리 우리에겐 짊어져야 할 무게가 있었다.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다시 만난 후의 데이트는 두 번 모두 마치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았다는 듯, 으레 이렇게 만나왔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마음 편히 시작할 수는 없었다. 우린 분명히 무언가 꼬인 실타래가 있었고, 이를 마주하지 못한다면 똑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난. 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기차에 올라 제자리를 찾아 앉으니 그제서야 외투가 머금은 냉기가 조금씩 빠져나간다. 희붐한 어둑새벽빛이 창을 넘어 새었다. 그러더니 금세 밝아졌다. 고요하고 스산한 새벽 여행일 줄 알았더니, 밝고 희망찬 아침 여행이었다. 기차는 1시간쯤을 가서 제천역에 멈춰 섰다. 얼음 알갱이가 공기 중을 떠도는 듯하다. 투명하고 맑은 얼음처럼 하늘은 선명했으나 옅게 푸르렀다.

몸을 옹송그렸다. 정말이지 너무 추웠다. 음악을 들으려고 챙겼던 헤드셋은 귀도리 역할을 대신했다. 방한용 마스크를 사서 쓰고, 핫팩도 하나 뜯었다. 핫팩은 아무리 흔들어도 뜨거워지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핫팩을 손과 함께 쑤셔 넣고 의림지를 둘러싼 데크길을 걸었다.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하염없이 걸으면 내 내면으로 파고들 줄 알았다. 인생의 중요한 질문이 떠오르고, 그에 관련된 여러 가지 생각이 비산 할 줄 알았다. 나는 곧 중요한 마지막 만남을 앞두고 있었으니 사랑이라던지, 결혼이라던지 그에 관련한 다양한 질문거리와 생각으로 파고들 줄 알았다. 발은 데크길을 걷고 눈은 꽁꽁 얼어버린 호수를 바라보면서도 정신만큼은 내 안으로 침잠할 줄 알았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떠오르지 않았다. 발걸음에 맞춰 삐그덕 대는 데크길의 나무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용추 폭포의 물소리. 어딘가에서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새소리. 옅게 투명한 구름 없는 하늘. 얼어붙은 호수. 그 사이에 비집고 자리 잡은 수변 나무. 가끔씩 마주하는 조깅하는 주민들의 말소리. 나는 이 사이에서 어떤 생각으로 침잠해야 할까.

날카롭고 묵직한 추위가 문제일까. 공기에 떠도는 냉기가 두 볼뿐 아니라 정신까지 얼어붙게 한 걸까. 아니면 오히려 좋은 걸까. 나는 골똘히 생각해야만 하는 고민 없이 명확하고 가벼운 걸까. 겨울이어도 햇빛은 여전히 내리쬐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를 통과해 떨어졌다. 주머니 속에 아직 미지근한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반년 전 여름 안동 낙동강을 하염없이 걷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나는 홀로 걸으면 내면의 나와 마주하겠거니 기대하며 걸었다. 닦아도 닦아도 마르지 않는 땀을 흘려내고, 운동화 밑창을 뚫고 올라오는 열기를 밟으며 걷고 걸었다. 35도에 육박하는 기온에 낙동강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견뎌내야 할 건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뿐이었다. 나는 내면의 나에 도달하지 못하고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와 시간만을 가끔씩 떠올렸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열기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나 뜨거운 줄 모르고 반짝이는 윤슬, 가끔씩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눈에 담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목적 없고 의미 없는 걸음걸음을 다 끝내고 나선, 공중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하루를 다 살아냈다는 성취감 같은 것에 취했다. 뙤약볕의 여름 안동의 걸음과 얼어붙은 겨울 제천의 걸음은 닮아있었다. 걸음과 걸음은 연결되어 있었다.

마지막 만남을 앞두고 질문이나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던 건, 내 마음은 이미 답을 내려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만남에서 내가 내릴 결정은 이미 답을 내린 종결된 의문이었다. 난 많이 단단해졌어. 다시 만나도 내 세계를 잃지 않을 수 있어. 난 그가 여전히 좋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선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일을 배워야만 한다.”고 했다. 내 지금 이 순간을 채우는 건 생각과 의문이 아니라 걸음과 감각이었다. 주머니 속 핫팩은 미지근해졌다 뜨거워졌다를 반복하며 손을 녹여냈다. 도시에선 마주하기 힘든 고즈넉함. 그 고즈넉함을 마주하기 위해 여행을 왔음을.

이전 05화기억은 다시 추억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