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다. 다양한 기록을 병행한다. 일기도 쓰고, 블로그도 쓴다. 글쓰기 모임에 나가 키워드 별로 글을 쓰고, 브런치북도 연재 중이다.
그중 가장 역사가 긴 것은 단연코 일기. 매일 쓰지는 못해도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쓴다. 손글씨는 타이핑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손날에 스치는 종이의 질감, 볼펜심이 종이 위에서 서걱대는 소리. 있었던 일, 감정, 생각을 손글씨로 꾹꾹 눌러 담으면, 내가 눌러 담은 만큼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일기는 쓰임으로 끝나지 않고 종종 펼쳐진다. 가끔은 날을 잡고 이전에 썼던 일기를 읽어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일기지만 꼭 남의 일기 같다. 타인의 기억을 훔쳐보는 것처럼 내 것이 아닌 양 느껴질 때가 있다. 한참 우울했을 때 썼던 일기 속 난, 우울이 가시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일기를 다시 읽을 때쯤이면 그 이후로 우울과 행복을 몇 겹이고 지난 때라 다 지나가는 일임을 알게 된다. 다 지나고 나서 댓글을 달아준다.
ㄴ 엄청 울었었구나. 나중엔 울려고 별 기억을 끄집어내 봐도 눈물이 안나. 걱정마 -2023.09.31-
ㄴ 너 꽤나 인생을 즐기고 살고 있어! -2024.4.12-
ㄴ 아직도 답을 찾지는 못했어. 그래도 그게 꼭 절망은 아니야 -2024.12.13-
그때의 내가 알지 못했던 미래의 나를 댓글로 알려준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댓글을 썼던 때도 과거가 되어서 그 밑에 대댓글을 써주기도 한다. 도달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과거의 나에게 위로를 건넨다.
블로그는 그다음으로 역사가 길다. 주간일기를 블로그에 올린 지도 벌써 2-3년쯤 된듯하다. 한 주가 지나면 그 주의 일상을 몰아서 올리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누군가는 끈기 있다고 칭찬하겠지만 나에겐 별게 아니다. 올리는 게 재밌으니까 시간이 남으면 블로그에 들어간다. 아직 올릴 때가 되지 않았어도, 즐거운 일이 생기면 블로그 올릴 생각에 신이 나기도 하다. 일상 아카이브의 역할은 인스타도 하긴 한다. 매월 한 달을 망라하는 게시글을 올린다. 그 달의 가장 빛나는 순간만을 모아놔서, 피드에 사진이 쌓일 때마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항상 빛나는 시간을 사는 건 아니니깐. 인스타는 ‘나 이만큼 인생을 즐겨요’의 보고라면, 블로그는 ‘나 이런 인생을 살아요’의 누적이라 훨씬 진실되다. 사진이나 영상까지 올릴 수 있단 점이 아날로그 일기와의 큰 차이다. 일기와 마찬가지로 종종 옛 블로그글을 본다. 감정과 생각뿐 아니라 계절이나 스타일, 내 얼굴 생김새의 변화까지가 누적된 글에 모두 담겨있다. 그러면 그때의 내가 그 속에서 숨 쉬고 있어서, 지난 시간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타인의 것 같지 않고 좀 더 내 것 같다.
왜 나는 나의 것을 내 속에 담아두는데 그치지 못할까. 나를 표현하고 드러내고 설명하고 싶다. 블로그나 일기는 저장의 목적이 크다면, 브런치나 글쓰기모임에서의 글쓰기는 표현의 목적이 크다. 내가 겪은 감정과 심정을 정확한 언어로 풀어내어, 읽는 이들의 생생한 공감을 받고 싶다. 평면적이고 표면적인 감상 밑에, 흔히 표현되진 않지만 누구나 느끼는 인간의 모순과 욕망, 이런 난잡하고 꼬인 마음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싶다.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는 그런 거다. 그래서 굳이 시간을 내어 글을 쓰고 모임에서 나누고 브런치에 올린다. 글을 읽어주고 몇 마디 해주는 게 달콤해서 끊지 못한다. 작은 관심과 칭찬에 중독되어 더 목말라한다. 붙잡아 앉혀두고 글을 읽히고 칭찬을 쏟아내라고 강제할 순 없으니까, 내 글이 더 읽히는 글이 되게 하려고 발버둥 친다. 글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쓸까, 어떤 소재를 사람들이 좋아할까, 일기는 많이 썼는데 많이 읽히는 에세이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뭐 이런 것들을 찾아본다. 일을 하면서도 일을 잘하고 싶어서 노력한 기억이 없고, 뒤에서 날 쫓아오는 가상의 선에 떠밀려 전문성을 향상당했는데… 가장 능동적으로 ‘굳이’ 날 성장으로 밀어 넣는 영역은 아무래도 글쓰기인 듯싶다.
‘내가 굳이 시간을 쓰는 일’은 알게 모르게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굳이’를 잘 들여다보고 있자면 ‘기꺼이’가 따라붙는다. 굳이 한다는 건 기꺼이 한다는 거다. 나를 남들과 다르게 만들고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일이니까. 내가 나다워지는 일에는 주저할 게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