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이야기 3. 재회 유예

2부. 사랑과 용기

by 글희
202X.01.XX 일기 발췌-
공백을 인식하지 않고 머릿속에만 그리는 건 편안하고 자유로웠다. 지금은 심란하다. 내 상상 속 그는 나의 피사물이라 나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으나 실재하는 그는 내 마음을 마음껏 다치게 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고, 다시 만나고 싶다. 내가 먼저 이 말을 꺼내고 싶지는 않다. 그 정도 말도 못 꺼낼 마음이라면, 그 마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다. 난 오빠의 안부가 궁금하기보다 나에 대한 마음이 궁금하다. 나의 존재가 컸는지, 잊을 수 없었는지, 후회하는지

그를 그리워하는 건 쉬웠다. 상상 속 그는 항상 내 말에 쩔쩔맸다. 나에게 미안해하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마음대로 그를 휘둘렀다. 원망도 했다가 거절도 했다가.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통쾌한 상상을 해보다가 번뜩 현실로 돌아오면 허탈해서 키득댔다.

그러나 곧 내가 만나야 하는 그는, 내 맘대로 다룰 수 있는 상상 속 캐릭터가 아니었다. 나를 마음껏 거절하고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용기였다. 그는 날 어떤 표정으로 맞이할지, 나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꺼내는 이야기를 다 듣고 돌아가는 기분이 어떨지 알 수 없었다.

종각역 3번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다. 한 걸음 다가갈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 가슴 살갗만큼은 따뜻했다. 그는 이미 도착했다고 했고,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만이 단 몇 초를 남기고 남아있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은 2년이 흘렀음에도 똑같았다. ​과연 내가 어떤 표정을 짓게될 줄 몰랐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너무 신기해서. 반가워서. 웃음이 지어졌다. 반갑다는 말이 연거푸 나왔다.


‘세상에 이 얼굴을 다시 보는구나’


상상 속에서만 펼쳐졌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신비함에 한껏 들뜨는 동안 그는 별안간 눈물을 닦았다. 우리 모습은 이별했던 당시 모습 그대로였다. 난 울지 않았고 그는 울지 않는 척 울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겼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별의 아픔을 다 지워냈던 2년 동안

이 사람은 날 지우지 못했구나.

내가 다 지워지지 않을 만큼 내 존재가 컸구나.

미리 예약해둔 식당에서 그간 연결되지 못한 근황을 모두 연결지었다. 어색함은 술로 풀었다. 한 잔 두 잔 잔이 텅 비어가는 사이 난 모든 위로를 다 받았다. 그도 많이 힘들었구나. 2년이 지나도 날 잊지 못했구나. 내 그간의 애씀과 지난 사랑은 별볼일 없던게 아니었구나. 다음 이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

​그러나 술과 옛이야기에 무르익은 분위기는 그의 낭만적인 고백으로 산통이 깨졌다.



“널 지금 만나고 있는 게 꿈만 같아. 내일이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쎄했다.

오늘의 조우는 꿈이고, 내일이면 사라지는 신기루인가.

다음 만남은 기약이 없는가.

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날 만난 걸까. 친구 하자며 불러낸 거냐, 근황 나누고 끝내려던 거냐며 물었다. 그는 모호하게 답했다. 일단 몇 번 더 만나보고 싶다고. 괴로웠다. 관계의 방향을 또다시 내가 주도해야하는가. 나는 가만히 서있고 상대가 날 끌어줄 순 없는가. 내가 고민하고 방황하는 동안 상대가 내게 확신을 줄 순 없는건가. 난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기울어진 관계는 우리 이별의 원인이기도 했으리라. 나는 늘 그의 속도에 맞춰 관계의 박자를 조율했다. 나는 스스로 낮아졌고, 그는 원치 않게 높아졌다. 한쪽은 요구하고 한쪽은 부담스러워했다. 이 점이 늘 괴로웠다.


유예를 택하는 그의 모습은, 과거의 거울처럼 반복될 미래를 그대로 비추는 듯했다. 괴로움을 또 반복하지 않을까. 이번엔 내가 먼저 멈출 수 있을까.

​​

“몇 번 더 만나보고 싶다면, 그 연락은 오빠가 해. 난 안 할 거거든.”

​​

“내가 할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호하고자 했으나, 스스로를 기다리는 위치에 놓이게 했고, 결정권을 그에게 넘겼다. 후회는 없었다. 생각해 온 모든 말을 다 했다.




‘깃대다’는 없는 말이다.

깃들고, 기대고, 빗대어진 말이다. 생명은 육체에 깃들어있고, 기대고 있으며, 곧잘 빗대어져 설명된다. 실체가 모호한 단어가 으레 그렇듯, 용기 또한 그 선택으로써 후술 될 뿐이다.

내 용기는, 움직이지 않는 데 있었다.

예전의 나는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 움직였지만,

이번엔 제자리에 서 있는 걸 택했다.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모호함과 불안 안에 살면서도 삶을 이어가면 되니까. 삶은 늘 살아졌으니까. 나는 잘 살았으니까.

나는 그날 밤 그와 헤어지지 못했다.

집으로 가는 길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행히 그에게 ‘오래’는 1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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