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사랑과 용기
용기는, 내가 외면하고자 하는 두려움을 직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내 마음을 정확히 보고 알아야, 어떤 이야기도 받아내고 잡을 수 있으니까.
오랫동안 품었지만 절대 볼 수 없었던 이름이 눈앞에 떠올랐다. 빛을 잃었던 동공이 선명히 열린다. 처음 손을 잡았던 스무살 때처럼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사랑하는 만큼 한때 원망하기도 했던 사람. 그의 메일은 공백 기간만큼이나 신기했다. 꿈인가 싶었다. 학생 때는 절친했으나 사회인이 되며 멀어진 옛 동창을 우연히 만난 듯 반가웠다.
내가 무얼 해야 하지? 자리에서 일어나 얼어붙은 듯 고민하다가 바로 카톡을 보냈다.
- 오빠야말로 메일 잘 안보잖아. 카톡으로 답해
- 잘 지내지?
평이한 문장을 쓰는데도 손이 마음과 함께 떨렸다. 반가움은 느낌표에 담겨 카톡을 오갔다.
- 그때 술 한번 하자고 했던 말은
- 유효해
사흘 뒤 금요일. 자그마치 2년 만이다.
약속을 잡고 나서야 덜컥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절대 가볍게 반갑기만 할 사람이 아닌데…
다양한 질문이 머릿속을 질서 없이 떠돌았다.
나는 왜 생각 없이 약속에 응해버린 거야
약속에 나갔을 때 나는 어떤 스탠스여야 하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쾌활하게 굴면 되나?
아니면 오히려 아련하지만 냉철해야 할까?
얼굴을 보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되는 건가?
근데 있어봐. 이 오빤 무슨 마음으로 연락하려는 거지?
막상 만났는데 나는 미련 철철이고, 이 오빤 정말 가볍게 궁금해서 만난 거면 어쩌지?
그래서 내가 상처받으면 어쩌지?
답 없는 질문이 급류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뿐이다.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우린 잠깐의 대화로도 다시 만나고 싶음을 묵시적으로 알았다.
난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없고, 우린 그런 사이가 될 수 없다.
서로의 근황과 안위를 나누고 영영 이별하는 결말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금요일에 다시 보는 만남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라면, 난 2년 전 그때처럼 그와 또다시 영영 이별해야 한다.
다시 이별 첫날로 되돌아갈까 봐. 또다시 상처 입고 내가 애써 재건한 2년간의 삶이 또다시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바람과 기대, 들뜸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 나는 이 사람과의 재회를 기대하는구나.
혹시나 마음속 작은 확신이 모두 어긋났을 때의 내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 이벤트를 말하지 못했다. 내가 이 만남에 거는 기대와 들뜸을 친구가 알아차린다면, 이후에 기대가 어긋났을 때의 내 모습까지 다 들통나버릴 테니까.
혼자 일기장에만 생각들을 적으며 예상되는 흐름과 결말까지 부정했다. 둘 다 재회에 대한 기대를 안고 만나는 거면서, 둘 다 어떤 마음으로 나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궁금해했다. 길을 알고 있는 미로를 일부러 헤맸다.
그날의 약속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마주할 용기를 택했다.
나는 그를 왜 다시 만나고 싶었을까.
이별하고 한동안을 울면서 그를 떠올리는 일기를 썼었다. 오랜만에 일기장을 다시 펼쳐봤다. 그 속에는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장면 장면이 남겨 있었다.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농담. 장난으로 표현되는 애정. 볼을 꼬집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어주었던 사랑. 귀여웠던 우리.
우리가 다시 만나면, 과연 이전의 우리처럼 귀여울 수 있을까. 사랑스럽게 함께할 수 있을까.
펼쳐본 일기장에서 꾹꾹 눌러놓은 애틋함과 그리움이 삐져나왔고,
어쩌면 그 사랑스러운 연애를 다시 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같이 삐져나왔다.
권태와 불균형으로 괴로워했던 나날은 견딜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똑같이 반복될 거지만, 함께함을 선택하고 싶다고.
변한 건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만나고 싶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여기 있구나. 여기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