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고모가 있었는데
내가 초등학교 때 고모는 이민으로 한국을 떠나셨다.
그때는 나도 어렸고 이민이 자기 나라를 떠난다는 의미인지 잘 몰랐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미처 몰랐다.
그런 고모는 내가 결혼할 즈음 한국에 오신 적이 있다.
그렇게 두세 번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모는 아들과 딸 둘이 있는데 그중 큰 딸과 호주의 골드 코스트에 살고 있었고
큰 딸 그러니까 나의 육촌 언니가 한국을 떠난 지 50여 년 만에 외삼촌인 아버지를 뵈러 한국으로 왔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여학생이 할머니가 되어서 한국 땅을 밟았지만
어릴 적 사진으로만 남아 있던 언니의 얼굴이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져서 다행이었다.
언니가 아들을 데리고 한국 집에 도착한 날은 마침 친정엄마의 제사 날이었다.
그 바람에 나도 서울에 올라가 있었고 모처럼 식구들이 다 모여 있었다.
언니가 가지고 온 많은 선물을 풀어보며 한 자리에 모이니
갑자기 50년이 넘는 시간이 뛰어넘은 것 같았다.
언니는 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한 끝에 성공을 해서 부자가 되었고
이제는 은퇴하고 수영장이 딸린 아주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며칠 후 부산으로 돌아갔고 언니와는 그날과 다음날 두 번 만났을 뿐
언니 역시 다시 호주로 돌아갔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호주로 돌아간 후 나는 감사의 인사를 메일로 전했다.
그렇게 시작한 메일이 지금껏 이어져 왔는데 어느덧 10 년이 넘었다.
언니는 굉장한 애견인이라 일상 이야기뿐 아니라 신기한 개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다.
나는 삐삐가 입양 오기 전 미장원에서 불 난 사건을 메일로 써서 보낸 적이 있던 터라
의도치 않게 삐삐의 역사를 다 들려주게 된 셈이었는데
당시에는 내가 미장원 개를 입양하리라 짐작도 못했겠지만 언니는 그 이후로 늘 삐삐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오직 메일로도 관계를 이어나가기에 충분했는데
대화를 할 때마다 존경스럽고 배울 점이 많았다.
특히 개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고 나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언니는 개 두 마리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넓은 집에서 직접 수영장 청소며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고 사는 것이 놀라웠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부지런했다.
집안일뿐 아니라 강아지 두 마리도 완벽하게 보살피고 있었다.
언니에게는 나를 만나기 전 싸리라고 불리는 개가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나고 다시 입양해 온 시츄도 싸리라고 이름을 붙여 기르고 있었다.
또 한 마리는 소피라는 개인데 몰티즈 종으로 삐삐와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착한 강아지였다.
언니는 싸리와 소피 사진도 보내주었고
한국 책과 음악 그리고 뉴스 드라마까지 열심히 보며, 어느 때는 나보다 더 한국 사정에 밝아
여름 겨울이 한국과 반대인 나라에 떨어져 있어도 곁에서 지내는 것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한 번은 영정 사진으로 쓰게 될지도 모른다며 두 녀석을 사진관에 데리고 가 사진을 찍어 보내왔고
만약 메일이 끊어지면 내가 죽은 줄 알라고도 하셨다.
어느 날 언니는 갑자기 싸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무섭게 달리는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고, 미친 사람처럼 병원을 찾아 뛰어다니며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불행한 일은 일어났고 소피 혼자 남았다고 했다.
두 녀석이 의지하고 함께 살다가 하나가 떠나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언니는 아픈 싸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이별의 슬픔으로 미처 남은 소피 생각은 덜 했을 것이다.
아들에게 소피를 맡겨 두고 병원을 다니며 의사를 고소하기 이르렀는데
의사의 명백한 잘못을 밝혀서 다시는 다른 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고 결국 그 일을 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니는 싸리와 같은 종류의 강아지를 입양했다.
싸리를 못 잊어서 그런 것 같았고
시츄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종을 선호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꼭 붙어 지내던 형제 같은 언니가 떠나고 새로운 아기 강아지가 입양되었는데
철부지 망나니로 들어온 강아지 때문에 소피는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착한 소피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이제 자기가 언니 역할을 하며 잘 지내는 듯했다
헌데 어느 날 어처구니없이 소피가 갑자기 아프다고 했다.
산책 중에 무슨 독약을 먹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고 하며
다시 병원을 뛰어다니더니 죽음을 알려 왔다.
너무나 기가 막혔고 두려웠다.
언니는 지금 수지라는 강아지 한 마리를 다시 입양해서 두 녀석을 데리고 살고 있는데
70이 된 나이에 한창 기운 넘치고 어린 두 녀석을 감당하고 있다.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이웃의 개들에게 육포를 나누어 주며
도마뱀이나 오리새 에게도 먹이를 주신다.
한국에 오셨을 때 오리 고기를 대접하겠다고 하니 그 예쁜 오리를 먹느냐? 고 물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는 오리를 흔히 볼 수 있어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지금도 가끔 펠리컨을 보았다며 사진을 보내 주시기도 한다.
한동안 언니는 작은 도마뱀에게도 먹이를 열심히 챙겨주며
그 녀석이 안 나타날 때면 걱정스러운 메일을 보내곤 했는데
나도 빠지지 않는 동물 애호가이지만 언니의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열성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언니를 보면서도 삐삐 이후에 다시는 개를 입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이피를 보낸 이후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삐삐가 또 찾아왔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는데 남편은 딸이 있는 하와이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
자식 곁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고 날씨도, 공기도 좋고
사계절 따뜻하니 노인들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몇 년 후에 어떻게 할지 장담할 수 없고 만약 여기를 떠난다면 두고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 남편과 내 나이가 젊지 않다.
15년을 책임진다면 80살이 되는데
산책이나 목욕을 시키는 등 예전처럼 개를 보살필 자신이 없다.
제이피 때와 삐삐 때를 비교해보면 나 역시 같지 않다고 느꼈다.
제이피는 중형견으로 15킬로 정도였 는데 그때는 내가 젊어서 자주 안고 다녔다.
지금은 어림도 없고 6킬로 삐삐를 안을 때마다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끔은 손주와 삐삐가 헷갈려서 ‘할머니가 해줄게’ 혹은 ‘엄마한테 와' 하며 반대로 헛소리를 하곤 했는데
정말로 난 할머니가 되어서 삐삐는 나에게 늦둥이가 된 셈이었다.
병원에 가면 젊은 보호자가 와 있으니 비교도 되는 거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어린 아기를 입양한 언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중성화 수술을 시작으로 처음부터 차근차근하게 해 나가고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존경스럽다.
비로소 삐삐를 보내고 나는 개 없이 살기 힘든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언니가 언젠가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개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삐삐가 다리 수술을 했거나 아플 때 언니는 삐삐 앞으로 2-3번 편지를 보내왔다.
물론 삐삐가 편지를 읽을 리 만무하지만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용기를 전하고 글을 적어 보내준 사람은 없었고 아무도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언니에게 이제야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