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연남동 : 실론 살롱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친구와 연남동을 거닐다 골목에 숨어있는 카페로 향했다. 홍차 전문 카페인 '실론 살롱'.
커피를 내리고 디저트를 파는 집은 많지만 전문적으로 홍차를 내는 집은 극히 드문 우리나라. 최근엔 애프터눈 티 세트가 SNS에서 인기몰이를 하며 드문드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고급 홍차 브랜드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티 살롱과 개인 티 카페가 많이 생겨나는 추세지만 오늘 소개할 '실론 살롱'의 행보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오로지 홍차만 취급한다는 것.
보통 제아무리 홍차가 메인이라 해도 아메리카노 하나쯤은 파는 법인데 이 집은 커피 자체를 메뉴판에 들이지 않았다. 삼시 세끼만큼 커피를 중시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과감히 커피를 팔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이들에겐 굉장한 모험일지 모른다. 그만큼 커피 수익은 기대하기 쉬워도 홍차 수익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우리나라 카페 트렌드.
조용하고 고요한 곳. 은근슬쩍 80년대 풍경이 보였다 말다를 반복하는 골목 사이 '실론 살롱' 간판이 보인다. 투박하게도 간판이 'ㅅㄹㅅㄹ' 만 기재되어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고 헤맬 뻔했다.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 안을 들어서니 손님은 우리뿐. 테이블은 겨우 3개가 전부다. (하지만 머지않아 테이블은 꽉 찼다) 그리 푸짐하지 않은, 하지만 빈약하진 않은 메뉴판이 보이고 홍차 전문점이라 내심 스콘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디저트는 마카롱과 당근 케이크가 전부.
조금 더 메뉴판을 살펴보니 독특하게도 이 집은 브랜드 홍차를 내지 않는다. 주인장이 직접 블렌딩 한 홍차를 내는 것이 특징. 보통 카페라면 브랜드 홍차가 당연할진대 이 집은 자체 블렌딩이란 쉽지 않은 길을 택했다. 커피도 팔지 않고, 홍차와 적격인 스콘도 없고, 자체 블렌딩 홍차만 판매하는 좀 독특한 카페. 이것은 주인장이 얼마나 홍차를 애정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고집을 카페 운영에 잘 투영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나는 따뜻하게 우린 실론 살롱 블렌딩 밀크티와 당근 케이크를 주문했다. 어떤 찻잎을 쓰는지 궁금해 물어보니 아쌈이 베이스란다. 밀크티는 아쌈으로 우렸을 때 가장 깊고 맛있기 때문에 고민 없이 이것으로 주문을 마쳤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밀크티는 아쌈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뜨거운 우유의 부드러움이 잘 배합되어 있다. 특히 프랜차이즈 카페나 일반 카페의 밀크티는 찻잎이 조연이고 단맛이 주연인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밀크티 본연의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해내고 있다. 단맛이 조연이고 찻잎이 주연인 밀크티, 참 오랜만에 마신다.
끝 맛이 굉장히 쌉싸름해 얼핏 짜이 느낌도 들지만, 짜이로 확 넘어가지 않고 밀크티와 짜이 사이의 줄타기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정통 밀크티에 익숙지 않은 친구는 단맛이 연해 맛있는지 잘 모르겠다 평했지만 내게는 올해 마신 밀크티 중 가장 맛이 괜찮을 정도로 좋았다.
디저트로 주문한 당근 케이크는 밀크티만큼 이 집만의 특별한 매력을 보여주진 않는다. 핸드메이드 느낌이 고루 스민 조금은 투박한 자태. 그리고 살짝 느슨하고 평범한 맛.
대부분의 블로거들은 홍차보다 당근 케이크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내게 있어 케이크는 그저 밀크티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기본기만 고루 갖춘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 꽤 인색한 평가를 내렸지만 사실 맛은 있다. 단맛이 강하지 않고 식감 또한 촉촉하고 부드럽기에 홍차와 잘 어울리는 건 확실하다.
아마 홍차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 집의 매력이 깊게 와 닿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싸한 홍차를 마셔보고 싶다는 열망, 평소 홍차를 아끼고 애정하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면 크게 애를 쓰지 않아도 이 집만의 고유한 매력이 맘속에 스밀 것이다.
* 외식 에세이에 수록된 모든 장소는 금전적인 지원 없이 작가가 기꺼이 돈을 지불하여 맛 본 곳을 대상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