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와 전혀 관련 없는 새로운 일상 기록
바다나 보러 가자!
스타벅스 자진 퇴사 이후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중국에서 1년간 같이 살았던 형에게 연락이 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연락한 형은 급작스레 울적한 목소리를 보이는 나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며 스타벅스 퇴사를 알렸다.
이에 형은 그럼 자기랑 바다나 보러 가자며 매우 로맨틱한 제안을 했는데, 바다 어디요?라는 질문에 형은 부산이 제일 만만하지!라는 답을 하며 부산 여행을 제안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계획된 부산 여행은 중국에서 같이 생활을 했었던 누나까지 합류하게 되며 평균 나이 35.3세의 부산원정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원정대에서 평균 연령 감소의 역할을 맡고 있는 나는 30일 오전 10시 20분 ktx를 타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지루했다. 비행기에서 10시간 넘게 비행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경이로운 것 같다. 마침내 지루함을 알았던 건지 앞의 아저씨가 격렬하고 거친 코골이를 선보였고 바로 뒷자리의 아기는 옹알이로 화음을 넣으며 내 지루함을 짜증으로 바꿔주었다. 모든 건 참 내 바람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여행의 시작부터 나름의 고난이 있었는데 그게 이번 여행의 고난을 암시하는 것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우리는 원정대라는 이름으로 모였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각기 다른 시간대의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도착한 나는 두 번째로 도착하게 될 형을 기다리며 부산역 안을 정처 없이 거닐었다. 부산은 과연 항구 도시여서 그런지 아니면 대표적인 관광지여서 그런지 외국인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 대부분이 일본인 아니면 중국인이었다.
한 20분 정도를 혼자 있었을까, 형이 늦어서 미안하다며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오랜만에 본 형은 그새 더 나이가 들어 있었다. 빨리 혼삿길을 열어줘야겠다 싶었다. 그간 두 분 정도의 형수님 후보군들이 있었으나 모두 형의 자잘한 조건들에 부합하지 않아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한 터였다. 최근 스타벅스 집합 교육장에서 만난 한 여성 분을 형수님 후보로 추진 중에 있는데 문제는 그 분과 형 모두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혼자만의 결혼 사업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원정대에서 홍일점을 맡고 있던 누나는 일을 마치고 저녁 기차로 올 예정이었기에 형과 나는 일단 해운대로 바로 향했다. 부산역에서는 해운대까지 바로 가는 직행 버스가 있는데 번호는 1003번이다. 캐리어를 잠시 놓을 수 있는 거치대까지 있는 특이한 버스였다. 역시 관광 도시 부산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남자 둘이 울적한 조합을 맞춘 채 버스에 올라탄 우리는 내리 한 시간을 달려 해운대로 향했다.
뭔가 어색한 고요함과 적막을 꺼려하는 나는 버스로 향하는 내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녁에 올 누나의 짝사랑 얘기와 과거 사랑 얘기를 떠들어대며 한 시간을 그대로 채워냈다. 특유의 저음과 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나로 인해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아마 누나의 짝사랑과 과거 남자 얘기를 다 들었을 것이었다. 누나 미안. 하지만 남의 사랑 얘기가 너무 재밌는 나이가 되어 버렸는걸?
그렇게 형과 나는 해운대 앞에 내렸고, 바로 이번 여행의 숙소가 될 토요코인으로 향했다. 형은 특이하게 직업 특성상 전국 각지를 다니는 중인데 갈 때마다 그곳의 토요코인을 이용한다. 멤버십까지 있던데 형은 토요코인에 지분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번 여행에서도 누나와 나를 굳이 토요코인으로 이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들어온 토요코인은 참 토요코인 스러웠다. 경제적인 느낌 그대로였다. 하긴 가난뱅이 주제에 숙소를 따지고 거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숙소비로 형에게 5만 원을 뜯겼다. 분명 몸만 오라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난청이 있었나 보다. 몸을 잠시 눕힌 뒤 우리는 곧바로 밖으로 나와 맥도널드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회 한 사바리 했을 것 같은데, 가난뱅이에게 회는 사치다. 국밥도 만원이 넘는 시대에 7천 원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맥도널드는 정말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어차피 이번 여행은 바다와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먹는 것에 돈을 많이 쓸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형과 누나는 거지가 아닌데 왜 굳이 나와 같이 초저렴 여행을 했는지가 의문이긴 하다.
해운대 바로 앞에 무려 페이커의 T1에서 운영한다는 PC방이 있다길래 맥도널드에서 나와 그 길로 위 사진에서 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형과 나는 평소 FPS 게임을 즐겨하기에 누나가 올 때까지 PC방에서 시간을 죽일 요량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남자 둘이 다닐 곳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해당 PC방은 1시간에 무려 3,000원의 가격을 자랑했다. 시설은 정말 대단했고 굿즈도 팔고 여러 먹을거리도 팔기에 그럴 수 있다고 여겼으나 우리의 이번 여행 모토와 콘셉트는 초저렴 그 자체였으므로 1시간에 3,000원이나 하는 PC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눈으로 구경하고 발로 걸으며 해운대의 경치를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무려 9년 만에 찾은 해운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달라진 것은 나의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었다는 점? 서글픈 마음과 함께 부산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잠시 멍을 때렸다. 바닷바람이 많이 매서울 것으로 예상했으나 부산은 정말 포근했다. 남부 지방의 위력을 몸소 실감했다.
비둘기만 있던 곳에서 와서 그런지 비둘기와 다른 조류를 보는 것 자체가 새롭고 신기했다. 그리고 뚱땡이 비둘기들과는 달리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부산 갈매기들이 나름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형은 AI의 위력을 보여주겠다며 갑자기 갈매기의 사진을 찍더니 사진 검색으로 정확한 갈매기의 학명을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이래서 여자친구가 없는 걸까. 뭐가 문제일까. 결과적으로 형 덕분에 내가 보고 있는 갈매기가 붉은 부리 갈매기인 것은 알 수 있었다. 퍽 고마웠다. 지식을 하나 얻어가는 느낌이랄까.
멀지 않은 곳에서 끼룩끼룩 끼끼룩 소리가 미친 듯이 들렸다. 무엇인가 하고 바라보니 아이들이 새우깡을 꺼내 들었다. 분명 갈매기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말라는 푯말이 있었는데, 한국인들 참 말 더럽게 안 듣는다. 저렇게 갈매기에게 둘러싸이면 무서울 것 같은데, 애들은 겁도 없는 듯 새우깡을 무료로 갈매기들에게 나눔 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하고 싶었는데 새우깡 살 돈을 선뜻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나는 가난뱅이다.
마지막으로 바다의 풍경을 눈에 담은 후 우리는 다시금 숙소로 돌아왔다. 돈을 안 쓰면 사실 관광지에서 할 것은 많지 않은 법. 우리는 숙소 침대에 누워 티비를 본 후 형이 그간 얼마나 많은 게임을 했는지, 어떤 게임을 몇 시간을 했는지 등을 얘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와중 형이 몇몇 게임에 1000시간을 넘게 투자한 것을 알 수 있었는데 100시간만 여성에게 할애했으면 지금쯤 애가 유치원에 있었겠다.
그리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누나가 도착했다. 그렇게 원정대 3인이 모두 모일 수 있었는데, 누나는 12시에 밥을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빨리 밥을 먹자며 형과 나를 재촉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냐는 질문에 누나는 삼겹살을 얘기했는데, 부산까지 와서 삼겹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취향은 존중해야 하는 법이고 나는 막내에 가난뱅이였으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찰나 형이 부산에 왔으니 낙곱새를 먹자며 우리를 이끌었다.
다행히 개미집이라는 낙곱새 음식점은 24시간 운영을 했기에 밤 10시부터 음주와 밥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배고픔에 절여진 속을 소맥으로 달래며 술자리를 시작했다. 단숨에 첫 잔을 들이켰다. 형은 소맥 기능사라는 자격증이 있으면 분명 수석으로 합격했을 인물이다. 이 솜씨를 다른 여성분들에게 선보였다면 지금쯤 애가 둘이었겠다.
너무 허겁지겁 먹느라 먹기 전 숟가락 세팅된 사진 밖에 찍을 수 없었다. 여행기를 쓴다면서 먹는 사진이 없다니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대단히 죄송할 따름이다. 그냥 그 정도로 맛있었기에 미처 사진 찍을 정신이 없었다는 것으로 너그러이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취해서 찍지 못한 것이 아니다.
낙곱새는 맵지도 짜지도 않은 크게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었다. 근데 사실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다. 부산이라고 크게 맛이 다른 것은 아니었으니 굳이 부산까지 와서 낙곱새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맛있지만 부산까지 행차할 것은 아니다 정도?
그렇게 우리는 낙곱새로만 소주 2병에 맥주 3병을 마셨다. 과거 중국에 있던 시절 18도짜리 중국 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시던 우리였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기가 부끄럽게도 이제는 상쾌환 없이는 술을 먹을 수 없는 미천한 몸뚱아리가 되고 말았다. 음식도 많이 욱여넣을 수 없었다. 배가 불러왔다. 그래서 2차를 갔다.
영화인들이 국제영화제가 되면 꼭 찾는 곳이라는 오뎅전문점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냥 오뎅탕이 아닌 스지오뎅탕을 파는 곳이었는데, 특유의 기름진 국물 맛이 전형적인 술안주였다. 문제는 가격이었는데 맛이 있는 만큼 가격도 상당히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스지오뎅탕 하나에 2만 8천 원이었다. 가난뱅이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인 것이 사실이었다.
아, 이곳은 스지오뎅탕을 비롯해 모둠꼬치와 각종 안주가 정말 맛있었고 분위기는 오사카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난 오사카를 가본 적이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곳의 최고 메뉴는 아사히 생맥주인 것 같다. 부드러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달까? 정말 2026년 들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모르겠지만 올해의 한 잔을 다소 이른 시기에 꼽자면 나는 이곳에서 먹은 아사히 생맥주를 꼽을 것 같다. 그런데 아뿔싸 이 맛있고 부드러운 술을 한 모금 마신 형은 갑자기 소주를 한 병 시키더니 거기에 옛 버릇 못 고치고 바로 소주를 부었다. 여자친구가 없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러블리한 아사히 생맥주를 완료한 후 한 잔을 더 마시고 싶었으나 소주를 먹어야 한다는 형의 요청에 소주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형은 부산에 왔으면 부산 소주를 먹어야 한다며 대선, 갈매기 등 부산에서만 파는 지역 소주를 연이어 시켰다. 폭주하는 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내 술에 조금 절여진 형은 인생에 대한 조언과 지금 여자친구에게 잘하라며 약 한 시간 넘게 폭풍 잔소리를 이어갔다. 후에 누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이때 술을 뺏고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는데, 듣는 당사자인 나는 어땠었겠는가.
역시나 안주 사진은 없다.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맥주 사진은 건질 수 있어서 다행이랄까. 그렇게 우리는 그 자리에서 소주 5병 정도를 해치우고 나서야 사장님의 가게 마감 선언에 음주를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아쉬워서 편의점에서 맥주사서 숙소에서 더 마신건 함정이다.
이후 새벽 4시 정도에 잠든 우리는 약 7시에 기상해 바로 해운대 바닷가로 향했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느새 목적이 부산에서 술 마시기로 변질된 것 같지만 우리의 여행 목적은 어디까지나 부산 바다에서 해가 뜨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해가 뜨기 직전 해운대의 분위기는 참으로 고즈넉하고 포근했다. 경주 문무대왕릉에서의 날카로운 바닷바람과는 달리 살을 에는 추위도 없었다. 그렇게 7시 24분 즈음이 되자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원을 빌었다. 1월 1일의 첫 해는 아니지만 미약한 소망이나마 빌어보고자 그냥 소원을 내뱉었다. 벌써 망한 것 같은 2026년이지만 제발 부디 좋은 기억이 나쁜 기억보다 더 많은 한 해가 되기를 바랐다.
해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체크아웃 시간을 꽉 맞춰 나가기 위해 남은 시간 동안 잠을 청했다. 음주의 여파인지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상쾌환을 두 번 먹었어야 했나 보다. 나약해졌다. 사실 원래도 강인하지는 않았다. 이후 우리는 거짓말처럼 국밥 한 그릇을 먹은 뒤 부산역 근처 카페에서 무려 3시간 동안이나 남은 인생과 향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말이 이야기를 나눈 거지 세 시간 동안 갈굼만 당했다. 술자리에서의 갈굼과 조언, 충고가 그대로 이어지는듯했다. 그 앞에서 내가 뭘 어쩔 수 있었겠는가. 그저 듣고, 경청할 따름이었다. 다 나를 걱정하고 위해서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음주와 새벽 기상에 모든 체력을 쓴 것이었는지 커피를 마신 이후 점심도 먹지 못한 채 거짓말처럼 역에서 헤어짐을 고하고 뒤돌아섰다. 사진도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다음 만남은 내가 거주하고 있는 대구에서 하자는 말만을 남기고 우리는 잘 들어갔냐는 흔한 안부 하나도 보내지 않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