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모든 게 무의미할지도

93년생, 시계 수리계에서 상장폐지를 선고받다

by 범어동

시계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나이가 많을 것 같지만, 국제시계연구원 소속 원생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갓 21살이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02년생을 비롯해 이제 30이 되었거나 20대 중반인 경우도 있다. 물론 나를 비롯해서 30이 훌쩍 넘었거나 심지어는 30대 후반, 50대 정도의 분도 계시다. 들어온 순으로는 거진 꼴찌지만 나이순으로 세우면 꽤나 앞순서에 놓이게 되는 아이러니 한 상황이란 말이다.


문제는 내 나이다. 막 젊지는 않지만 그래도 막 늙지는 않았다고 생각한 나이였는데, 세상이 바라보는 시선은 그게 아닌 듯했다. 평소와 같이 연습을 하던 어느 날, 한눈에 봐도 청년의 느낌이 나는 남성 분이 국제시계연구원을 찾았다. 알고 보니 이미 졸업 후 대형 명품 브랜드에서 일을 하고 있던 선배였다. 그 선배가 돌아간 후 원장님은 나중에 저 사람이 내 선배가 될지도 모른다며 나름 희망찬 미래를 읊어주셨다. 그러다 돌연 물으셨다. 그래서 나이가 몇이지?라고 말이다. 93년생이라고 했더니 나이가 너무 많다며 난색을 표하셨다.


당장 원장님을 찾았다가 돌아간 선배가 96년생인데 대리 직급을 달고 있다고 했다. 원장님은 이미 자리를 잡고 승진까지 한 사람들이 나 보다 어린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이 나이 많은 나를 후배로 대하기도 어렵고 나이 어린 선배를 대하는 나로서도 꽤나 고충이 클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결국 원장님께서는 나는 나이가 너무 많으므로 대형 브랜드로의 취업은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 올 초에 있던 모 대형 브랜드에서 원장님께 연락을 해서는 가용할 수 있는 기술자들을 보내달라고 했고 원장님은 30초부터 30 후반에 이르는 사람들을 보냈더랬다. 결과는 30초만 붙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원장님은 한국 시계 수리 업계에 있어 손꼽히는 대부이시다. 본인 입으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모든 기술자를 알지는 못하지만 모든 기술자는 나를 안다고 표현하실 정도이다. 이런 분께서 내가 나이가 많다고 안된다고 하신 것이다. 사실상 사형선고 혹은 상장폐지를 당한 느낌이랄까. 그 순간 내 모든 의욕이 사그라들었다. 단순히 시계가 좋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취업 및 안정적인 수입이 목적이 아니라고는 절대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먹고살아야 할 것 아닌가. 당장 이게 아니면 할 것도 생각나지 않는 판에 나이 문제가 걸림돌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더는 시계를 연습할 상태도 기분도 아니었다. 이런 나의 상태를 눈치챈 건지는 모르겠지만 옆자리의 02년생 친구와 95년생 동기가 함께 동묘로 가서 연습용 시계를 구매하자고 권했다. 원장님은 '나이'라는 잣대로 나를 평가했지만 정작 함께 수련하는 동기들은 나를 나이 많은 형이 아닌 함께 시계를 고치는 동료로 봐주는 듯했다. 나는 이대로 집에 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남아있자니 뭔가 너무 불편할 것 같은 마음에 제안을 수락했다.


가는 동안 말도 안 되는 소리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원장님의 말이 생각나 95년생 동기에게 나 진짜 취업 안되면 어쩌냐라고 말을 던졌다. 2살 차이 나는 동기는 내가 안 되면 자신도 취업이 안 될 거라며 위로를 건넸다. 사실 큰 힘이 되지는 않았다. 원래도 순두부 멘탈인데 으깨지다 못해 가루가 된 상태였다. 더군다나 동묘에서는 쓸만한 시계를 제대로 건질 수도 없었다. 주말이 아니라 그런 건지 시계를 쌓아놓고 판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실상은 전혀 달랐다.


약 2시간의 고군분투 끝에 상태가 안 좋은 기계식 시계 5개를 구할 수 있었다. 이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집에 오는 내내 힘들었던 것 같다. 당장 내일 이어지는 수업을 잘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취업이 안된다면 이것을 계속할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제목과 같이 어쩌면 모든 게 무의미할 수도 있다. 나는 진짜 시계 기술자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취업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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