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뾰토 Sep 25. 2024

이모 말고 고모

 5살과 3살, 미취학 아동 자매가 함께 사는 어른의 화장품을 찍어 바를 기회를 노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5살일 적, 고모는 우리 집 방 한 칸에 더부살이를 했다. 사회 초년생이던 고모는 한창 옷이며 화장품이며 사 나르는 데 재미를 들이고 있었고, 고모가 출근하고 나면 나와 동생은 길고양이처럼 방에 숨어들어, 그렇지 않아도 지저분한 곳을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곤 했다.


 고모의 좁은 방은 여러 잡동사니로 가득 차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러웠지만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정돈되지 않음과 코끝을 간질이는 먼지들과 약간의 고소함 그리고 은은한 화장품 냄새 따위를 좋아했다. 내가 고모가 벗어놓은 옷더미 사이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거나 바닥에 늘어놓은 속옷 따위들을 뭉개며 노닥거리고 있을 때, 동생은 고모의 화장품들을 공략했다.


 동생은 3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눈덩이에 섀도를 올리고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다는 공식을 알았다. 손끝이 덜 여물어 정교함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언제나 도도한 숙녀인 양 기품 있게 얼굴에 분칠을 하곤 했다. 이건 매번 우리에게 영토를 침범당하는 고모도 인정한 것이었는데 고모는 그런 동생에게 경상도 말로 애정을 담아 “야시”라고 부르곤 했다.


 그렇게 한바탕 놀다가 방에서 나오고 우리가 고모 방에 들어갔었다는 사실조차 잊어갈 때쯤이면 고모가 돌아온다. 곧이어 방주인이 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어린것들은 혼비백산 달아나지만 금방 붙잡혀서 방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혼이 난다. ‘고모 방은 원래 더럽잖아.’하는 나의 항변은 당연히 기각이다.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면 고모가 들고 온 간식 냄새에 군침을 흘린다. 퇴근하는 고모의 손에는 늘 빵이나 떡볶이 따위가 들려 있었는데, 고모는 야식 중에서도 ‘공주당’의 페이스트리를 사랑했다. 버터인지 마가린인지 모를 것으로 절여져 잔뜩 눅진해진 페이스트리를 한 겹씩 떼어먹는 것이 고모의 취향이었다.


 고모는 인심이 후한 사람이었기에 본인 방을 헤집어놓은 말썽꾸러기들에게도 너그럽게 음식물을 하사했다. 두 자매가 양손에 빵을 쥐고 아구아구 먹고 있으면 원래 부스러기가 제일 맛있는 거라며 고모가 봉지를 홀라당 가져가 버리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고모에게 달라붙어 손에 쥐었던 온전한 빵을 넘겨주고 봉지에 붙은 빵 부스러기 먹게 해달라고 애걸한다. 나와 동생은 고모가 마지못해 넘긴 빵 봉지에 머리를 맞대고 그 고소하고 달콤하며 짭짤한 것들을 가루까지 놓치지 않고 살뜰히 털어먹었다.


 간식 시간이 끝나면 영화 감상 시간이다. 어린이조차 되지 않은 유아들은 한밤중 상영회 시간에도 눈이 초롱초롱했다. 드래곤볼은 내가 처음으로 본 비디오 만화였다. 좁은 거실에서 집안사람들이 다 잠든 사이, 고모와 나란히 앉아 소리를 줄여가며 부모님 몰래 비디오를 보던 장면은 내 소중한 오래된 기억 중 하나이다. 서브컬처를 사랑하는 나의 취향은 이때 만들어졌으리라.

  



 고모가 우리 집을 떠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집이 시골에서 더 한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될 때쯤 고모는 우리 곁에 없었으니까. 꽤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내가 멀쩡한(?) 정신상태를 가진 어른으로 자란 것에는 고모의 지분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고모는 불과 24살밖에 되지 않았다. 24살도 성인인 것은 맞지만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24살은 얼마나 설익은 나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런지, 고모는 내가 그전까지 알던 어른인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과는 다른 종류의 어른이었다.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분량만큼의 다정함을 나누어주는, 어린 내가 나중에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어른. 나는 딱 그런 정도의 애정을 주는 고모가 참 좋았다.

 지금도 고모를 생각하면 화장품 향내에 섞인 고소한 빵 냄새가 생각난다. 약간의 게으름, 하지만 놀랄 만큼 정확한 발음과 논리적인 언변. 무엇보다 자기보다 어린것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나눠주는 다정함. 나는 나보다 어리고 약한 것들을 위해 얼마만큼 마음을 쓸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어느 계절에 태어났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