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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시퀸 이지 Dec 16. 2023

승진하지 않기로 했다

'정기 전보 및 보직희망 신청 기간'이 시작되었다. 지난 주는 퇴직 실장님 등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았다. 오랜만의 연말 안부는 아니었다. 승진 해서 원주 본원 가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었다. 

2급 승진을 하려면 우선 역량평가(보고서+구술)에 합격해야 한다. 시험과 인사는 반년마다 치뤄진다. 시험에 합격하고는 일곱 번의 인사가 있었다. 부장 승진은 인사위원회에서 '찍기' 관문을 거쳐 최종 원장 승인으로 결정된다. 승진자 발표가 나던 아침까지 '감(感)'이 좋다는 연락이 왔다. 결과가 발표됐다. 원주 본원과 10개 지원(본부) 중 승진 대상자에는 원주만 포함 되었다. 기관장의 방향성을 예고라도 한 듯이. 원주시와 거리 먼 수원시. 인사 결과도 물리적 거리에 비례 했다.   

칠전팔기,

는 하지 않기로 했다. 

승진. 직위의 등급이나 계급이 오름, 이란 뜻이다. 간호사 'CARE' 역량에서 '건강보험' 업무에 편입 했으니 더 많은 역량을 키운 것으로 승진은 이미 했다. 2002년 5월31일까지 입던 간호사복을 6월1일 정장으로 갈아 입었다. 토요일이었음에도 첫 출근에 다리 아닌 심장이 다 떨렸다. 설렘으로 밤잠도 설쳤다. 

입사 첫 업무는 '현지조사'였다. 사실관계 확인 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병원에서 청구한 진료비도 심사했다. 원심 결정에 불복해 이의제기 한 이의신청도 처리했다. 장기요양수가TF팀을 거쳐 요양병원 본사업에서 전산로직과 심사화면도 개발했다. IPTV사업단이 만들어지면서 심평원 DB를 가공해 '병원정보' 앱도 개발했다(상용화 벌써 10년 지났구나). 조직의 미래전략과제와 미래전략위원회, 정책토론회를 주관했다. 신의료기술 여부 판단 직제를 우리원으로 이관하는 법령을 신설했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비급여 항목 등재를 검토했다. 정책지원 파트를 대표해 기관경영실적보고서를 썼다. 신문, 방송 등 언론을 맡으며 위기관리도 맛 봤다. 그 안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는 업체 고객을 비롯해 수많은 사연이 담긴 직원들과 함께 했다.

지나온 길을 밟으니 어째 공로연수나 정년퇴직 분위기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내가 조직도 알고 관계도 배웠다. 승진 결과 발표 날은 서운하긴 했다. 유효기간이 딱 48시간 갔다. 서운함을 가만히 들여다 봤다. 회의를 잘 이끌기 위해 새벽 6시에 출근해 학원 다닌 일, 성과와 리더십 역량을 키위기 위해 평일과 주말 수업에 유튜브, 책, 칼럼 낭독을 수년간 해 온 일, 질병 휴직을 줄이기 위해 직접 운동을 배우고 가르친 일... 

내 기준에 입각해 내가 한 일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받는 사람, 조직 기준 부합 여부는 생각지도 않은 채(워낙 부족해서 채운 것 뿐인데). 회사 경영철학이 있듯이 나만의 경영철학이 있다. '책임, 신뢰, 재미'라는 나의 핵심가치는 언제 어느 때고 어떤 상황에서나 변함없이 발휘된다.       

승진자 결과 발표 이후 희한하게 아침 4시반이나 5시에 절로 눈이 떠졌다. 억울해서 '부릅' 뜬 눈은 아니다. 취기가 있을 때 말을 꺼내지 않듯이 글도 맨 정신, 마음이 평화로울 때 쓴다. 뭔가의 설렘이 내 눈을 번쩍번쩍 열어 제친다.     

 

부대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고 했다. 한동안 원주 방향으로 이도 쑤시지 않을 것 같다. 뒤끝 있는 여자? 맞다. 난 업무를 추진시키고 난 후, 운동으로 땀 흘리고 난 후, 엉덩이 진물나게  글을 쓰고 난 후, 공복 꼬르륵 한 후 맞이하는 한 끼 식사에 행복해 하는 사람이다. 현재의 기쁨을 얼마든지 보류할 줄 아는 뒤끝 작렬. 

 

죽을 때까지 일에서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라면 단 한 사람 충족할지언정 만년 현역으로 살 것이다. 그래야 내 인격이 승진할 수 있다.  

원주 본원이 아닌 현재 머무른 자리에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겠노라, 

는 '보직희망 신청서'를 제출 했다. 

지금, 현재, 이 순간 내게 주어진 역할에 책임을 다할 것을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굳게 맹세합니다.

회사 설문조사에 두 번이나 당첨 되고 어제 아이 수시 합격 소식을 듣고... 

뭣을 더 바라리오. 

감사함에 더 승진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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