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 독서모임 후기는 블로그에만 남긴다. 헌데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양다리 걸치고 싶다. 올해 두 번 읽기도 했거니와 내게 있어 올해 최고의 책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관한 책을 좋아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속마음 속엔 내 속이 들어 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통증'은 공포다. '변형성 고관절증(Coxarthrosis)', 1년간 함께 한 통증 속에서 이반 일리치도 함께 했다.
이반 일리치가 새로 장만한 집을 꾸미며 사다리에서 넘어져 다쳤을 때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부터 어째 그리 비슷할까. 또 통증에 한참 시달릴 때 도대체 왜 내가? 인간은 죽는다는 삼단논법에서 인간은 납득 되나 나라는 인간은 왜? 신은 왜 내게? 하며 저항 할 때 휴직 전 내 모습 같았다.
인생이 별 게 아닌데 별 거라고, 특별한 삶으로 치부했기에 '인간'이지 '나'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삶은 평범한 '일상'이거늘 '특별한' 무엇으로 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고 앞에서, 중증 환자 앞에서 '나'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이기적 위로를 하며 '감사'로 덮어 쓰며 희망을 찾았다. 아무튼, 톨스토이와소설광팬으로서 독서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이 곳에도 남긴다.
독서모임 후 송년회까지 내리~
책 초반부에 '부고 앞에서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거에 기쁨과 안도를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장례식장 가면 남의 일이라 다행으로 여긴 적이 있다 해요. 이에 대해 한 분도 나의 죽음이 아니라서 다행인 게 이번 구조조정에 내 이름이 없어 다행인 것과 오버랩 됐다 하네요. 이 말 들으니 깁스 한 사람, 길바닥에 장사하는 사람 등 주위 분들 모두에게 느낄 만한 저의 감정이더라고요.
처음에는 좋아서 한 결혼도 살다보니 서로를 무시하게 되는 장면 역시 남 일 같지 않았다고 해요. 집을 마련하는 장면에서 금술이 반짝 다시 좋았던 장면은 또 어떤가요. 경제적 안정기가 되면 불편함을 상대에게 찾는 건 아닌지요?
톨스토이는 죽음에 감정이입이 되도록 어찌 이리 겪지 않은 걸 인간 본능을 간파 하며 썼을까 모두가 놀랐는데요. 죽음이란 게 좋고 나쁨을 떠나 누구에겐 아픔, 누구에겐 감사일 수도 있겠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저로선 '통증' 느끼는 부분에 감정이입이 격하게 되어 '죽음을 맞이 하는 나'와 '죽어가는 이를 대하는 나'에 대한 생각에 잠겼어요.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소설을 쓰지 않기로 선언 한 후 쓴 책인데요. 실제로 와이프에게 선물한 책이기도 하대요. 한 사람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소설이라 평하신 분은 승진, 좋은 집에 대한 욕구는 자신과 상반 된다고 하네요. 지금보다 미래가 중요한 삶들을 살고 있는데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쓴 책이 아닌가 싶답니다.
게라심이 죽음 두고 한 말은 그런 면에서 참 와 닿죠.
"하느님 뜻인 걸요. 우리도 모두 그리로 갈 건데요"
한 분은 1장이 도통 읽히지 않아 2장부터 읽고 난 이후에 1장을 읽으니 읽혔다고 해요. 부고를 받았을 때 애도보다는 자신의 불이익, 이득을 따지는 게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걸 느꼈대요. 이반 일리치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기보단 슬쩍슬쩍 넘겼던 삶인 것 같다고 해요. 사다리에서 넘어져 아프면 당장 손을 쓸 일이지 그냥 저냥 넘어가 그 지경이 된 것도 안타까워요.
이반 일리치가 진실과 맞닥뜨리지 못해 넘어 간 게 아니겠느냐며 다들 왜 진실과 마주하기를 불편해 할까, 침묵하는 다수가 비겁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결국 "위선이 마지막까지 독이었다는 걸 안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자기 고통을 아는 자는 자신 뿐이라는 말이 공감되는 이유죠. 마지막 성찬 받은 장면에서 기대와 희망을 또 거는 걸 보면 결국 생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적당한 사치와 허영이 그를 지켜주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