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도둑놈의갈고리

뿌리 대본

by 이주형

도둑놈의갈고리

- 뿌리 대본 -


빈 마음이 비층구름을

소화하지 못한 지 오래다

여우비에도 그 마음엔

큰 홍수가 졌다


홍수를 건너려는 마음이

구름을 움켜잡아 보지만

천둥만 요란했다


꽃 숨을 기억하는 뿌리가

구름의 고집에 맞서려다

그냥 땅을 놓아버렸다


땅 위에 드러난 뿌리가

벽화를 그리듯 상형문자로

이야기를 썼다


처음부터 빈 마음이

아니었음을, 그 마음에는

꽃들이 가사를 쓰고

명지바람이 운율을 얹고

나무들이 합창하는 희망가가

언제나 향 좋게 울퍼졌

구름이 흥얼거리며 그 모습을

세상으로 전했다고


땅 위에서 더 도드라지는

뿌리가 선 굵은 말을 이었다


잊으라고, 잊어버리라고

도둑놈에게 달아놓은

갈고리 따윈 시원하게

잊으라고 원망도 잊고

절망은 더 잊고

길은 한 길만 있는 게

아니라고


뿌리가 말마다, 숨마다

도둑놈의갈고리를 가득 메단

말씀 대리인의 거짓길을 끊었다

비층구름이 뿌리를 따르며

거짓 사죄의 모습을 지웠다


빈 마음에 눈 맑은 뿌리가

길을 냈다